(사조영웅전 제13회 오호폐인 五湖廢人에서 황용이 전반부, 육승풍이 하반부를 부른다)
放船千里凌波去,略爲吳山留顧。雲屯水府,濤隨神女,九江東注。北客翩然,壯心偏感,年華將暮。念伊、嵩舊隱,巢、由故友,南柯夢,遽如許!回首妖氛未掃,問人間、英雄何處? 奇謀報國,可憐無用,塵昏白羽。鐵鎖横江,錦帆冲浪,孫郎良苦。但愁敲桂棹,悲吟梁父,漏流如雨。
배를 띄워 천리 거센 파도 헤쳐 가며 스치는 절경에도 마음 잠시 둘 뿐. 강 위엔 자욱한 안개, 파도는 신녀가 부리는 대로 출렁이고, 여러 물들 장강에 합쳐져 동으로 흐른다. 북쪽 새 퍼득이며 나는 소리에 웅대한 뜻 품었던 마음 헛되이 세월만 흘렀음을 느끼네. 소보(巢父)와 허유(許由)가 이(伊)、숭(嵩)에 은거했듯이 낙양에서 은일(隱逸)할 때의 옛 친구들을 생각하니 한바탕 꿈처럼 무상하구나. 북쪽 중원을 돌아보니 요사한 기운 아직 그대로인데 세상 사람들에게 묻나니 영웅은 어디에 있는가? 기이한 책략으로 보국(報國)코자 했건만 가련하다 아무데도 쓰이지 못하고 화살에는 먼지만 앉았네. 쇠사슬(鐵鎖)을 가로질러 막았어도 비단 돛은 출렁이는 물속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오주(吳主) 손책의 쓰라린 심정이여. 다만 시름에 젖어 노를 두드리며 슬피 양보음(梁父吟)을 부르니 비오듯 눈물이 흐른다.
주돈유의 사(詞)는 제재(題材)와 내용에 따라 대체로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 종류는 분방한 생활과 한가하고 편안한 심정을 쓴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우국(憂國)의 심사를 달래며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쓴 것이다. 이 <수룡음>은 후자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에 속한다.
송 흠종(欽宗) 정강(靖康) 원년(1126년), 금군(金軍)이 대거 남침하여 낙양(洛陽), 변경(汴京) 일대가 모두 전화(戰禍)를 입는다. 오래지 않아 변경이 함락되자 주돈유는 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어 먼저 회해(淮海) 지역에 도착했다가 후에는 장강을 건너 금릉(金陵)에 이른다. 다시 금릉에서 장강을 따라 올라가 강서(江西)에 도달했고 또 강서에서 광동(廣東)으로 남하하여 남웅(현 광동성 南雄縣)에서 난을 피한다. 이 사의 구체적인 창작시기는 고증할 수 없으나 사의 내용으로 볼 때 그가 회해를 떠나 장강을 따라 동쪽 금릉으로 내려가던 시기의 작품인 것 같다.
사는 처음부터 웅건한 필치로 광활한 수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천리 뱃길에는 거센 파도가 일고, 안개 자욱한 수면은 한없이 넓고 아득하다. “약위오산류고 略爲吳山留顧”는 그가 이번에 변경, 낙양 일대를 떠나 남으로 오는 것이 “산수(山水) 좋은 오월(吴越)을 찾는 것은 풍진 속의 낙양과 변경이 싫어서” (孟浩然,自洛之越: 낙양에서 월 땅으로 가며)가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아름다운 오의 산수에 대해 그는 잠시 눈길을 줄 뿐이다. 그가 실은 강적의 침입 때문에 이번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을 암시하고 있다. “운둔 雲屯” 세 구절은 장강의 수세(水势)를 묘사했다. “수부(水府)”는 본래는 별자리 이름으로 물을 관장하는 직책을 맡고 있는데 이곳에서는 물을 가리킨다. “구(九)”는 통상 많은 수를 가리키는데 “구강(九江)”은 장강이 다른 강물들과 합쳐져 호호탕탕 아주 멀리 동쪽으로 흐르는 것을 가리킨다. 그 끝이 얼마나 아득하게 먼가, 그러나 이 아득하게 멀리 뻗은 경계도 결코 작자의 흉금을 탁 트이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북객(北客)” 한 구절이 그 사람의 처량한 심정을 전해준다. 나라는 위기에 처해 있고 한 몸은 유랑 중이라“ 지금은 초췌하니 세상 어디에서 근심을 달랠까?”(如今憔悴,天涯何處可銷憂, 주돈유 수조가두水調歌頭)와 같은 마음이다. “장지미수 壯志未酬,차생노의 此生老矣”(주돈유 우중화 雨中花)(웅대한 뜻 이루지 못했는데 이미 늙어 버렸구나!)는 애국심에 불타는 시인의 우분(憂憤)을 표현한 것이다. 일반 문인의 늙음을 탄식하고 낮은 지위에 한숨짓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흥망과 민족의 존망과 시시각각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는 바로 작가의 사상경지의 숭고한 부분을 보여준다.
아래 구절의 “염(念)”자부터는 장면이 작자가 여러해 전에 낙양에서 은거했던 시절로 장면이 바뀐다. 이(伊), 숭(嵩)은 낙양 부근의 이궐(伊厥)과 숭산(嵩山)을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낙양 일대를 지칭하는 말로 쓰였다. 소(巢)、유(由)는 요(堯) 임금 때의 유명한 은사인 허유(許由)와 소보(巢父)를 말하며 여기서는 작자가 낙양에서 은거하던 시기의 벗을 가리킨다. 작자는 젊었을 때 인품을 닦고 힘써 실행했을 뿐 입신영달을 구하지 않았었다. 북송 말 금병(金兵)이 남침하기 전, 조정에서 일찍이 그를 경성(京城)에 불러 학관(學官)의 자리를 주려고 했으나 고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스스로 “식견은 좁고 거칠고 속되어 한적한 생활을 즐길뿐 벼슬은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송사 宋史 문원전 文苑傳) 라고 표명하였다.
그는 시, 술과 구속받지 않고 산수(山水)에서 유유자적하게 지내는 은일(隱逸)한 생활에 만족해 했다.
"나는 청도(淸都)의 산수랑(山水郞), 내 게으른 생활, 분방한 성격은 천제(天帝)가 그렇게 시킨 것이라네, 여러번 주청 끝에 풍운우로(風雲雨露)를 부릴 조령(詔令)을 받았지, 만 수의 시를 읊고, 천 잔의 술을 즐거이 마시는데 언제 제후나 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던가? 옥루금궐(玉樓金闕)에 돌아가기를 게을리하고 매화 꺽어 꽂아두고 낙양에서 취해 있다네."
" 我是清都山水郎,天教懶漫与疏狂。曾批給雨支風敕,累上留雲借月章。詩萬首,酒千觴。幾曾着眼看侯王?玉樓金厥慵歸去,且插梅花醉洛陽。”<주돈유 자고천(鹧鸪天)>
이는 자유분방하고 왕과 제후도 부러워하지 않으며, 작록(爵祿)을 구하지 않고 속박을 싫어하는 그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지금 환란을 맞아 실의에 빠져 남쪽으로 도망하는 때에 옛날의 동경스러운 은일(隱逸) 생활을 회상하니 마치 남가일몽 같다. 참으로 “감소일장전도몽 堪笑一場顚倒夢,원래흡사부운 元來恰似浮雲”(주돈유 임강선 臨江仙), (우습구나, 한바탕 뒤섞여 어수선한 꿈이여, 인생이란 알고 보니 덧없는 것이구나)이다. 꿈에서 이처럼 빨리 깨어나 지난날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느낀다. 그의 옛 은거생활에 대한 동경은 은거생활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갖는 시대의 특징에 그 의의가 있다. 봉건시대에 문인이 은거하려고 하면 비교적 안정된 사회환경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돈유가 이(伊)、숭(嵩)에 은거할 당시 북송 사회는 위기직전의 거짓 태평상태를 만끽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중원과 민초의 생활이 기본적으로는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어서 주돈유가 이 사를 쓸 당시 겪은 정처 없는 유랑생활에 비해서는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돈유가 과거 이, 숭에 은거했던 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은 기실 금병을 몰아내고 중원을 되찾아 이전의 그 시대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애국, 애족의 표현이다.
바로 이것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애정이다. 때문에 하반부 시작부터 작자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거센 파도를 타고 남하하면서 북쪽 중원을 돌아보니 요사(妖邪)한 기운을 쓸어 없애지 못했음을 통감하고 자신도 모르게 영웅을 갈구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영웅이 나와 요사한 기운을 일소해 주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전반부와 후반부가 뜻이 서로 연결되고 있다. 그 당시에 영웅이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송택(宗澤), 이강도(李網都)가 항금(抗金)과 실지(失地) 회복을 강력히 주장했으나, 모두 투항파에게 저지당했다. 이로 인해 울분으로 병들어 죽기도 하고, 강직(降職)되기도 하여 한 사람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눈앞 천리 뱃길의 지방이 삼국 정립(鼎立)시 촉오(蜀吳) 연합군이 조조군을 맞아 싸웠던 옛 땅이라는데 그의 생각이 미쳤다. 당시 제갈량은 그 얼마나 영웅이었던가, 기이한 책략으로 나라에 보답하고 지휘는 일사불란했다. 나약한 후주(後主)와 간신이 나라를 망쳐 결국에는 “화살에 먼지만 쌓이고”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 작자도 다른 영웅과 마찬가지로 비록 “웅대한 뜻”이 있지만 어찌할 도리 없이 “기이한 책략이 쓰이지 못하여” 영웅이 재능을 발휘한 여지가 없음을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이러한 심정을 <소막차 蘇幕遮>에서도 일찍이 드러낸 적이 있다. “재주와 지혜는 있지만 쓸 곳이 없구나, 영웅의 기개는 쇠하고 세상의 모진 고통을 다 받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눈앞의 지역 특징과 국가가 처한 상황은 서진(西晉)이 동오(東吳)를 멸망시킨 역사적 사실을 연상시킨다. 당년 오주(吳主) 손호(孫皓)는 장강이라는 천험(天險)에 의지하여 쇠사슬로 강을 가로지르는 방어진을 쳤어도 여전히 서진의 대장 왕준(王浚)의 누선(樓船)을 저지하지 못하여 비단 돛은 파도에 떨어지고 쇠사슬은 녹여져 끝내는 “항복의 깃발이 석두성에 걸리고”, “손책이 살아 있었다면 그 심정이 비통하였으리라” 는 결과가 되었다. 역사는 종종 놀랍도록 비슷한 부분이 있다. 고금(古今)을 비교하여 작자는 사(詞) 중에서 동오와 마찬가지로 중원을 잃고 양자강 하류의 일부 지방에 안거(安居)하는데 만족하고 있는 남송의 작은 조정의 앞길에 대한 근심을 살짝 드러내고 있다. 아랫 부분의 “단(但)”자로 형세를 바꿔 윗 부분의 역사평론을 마무리하고 서정(抒情)으로 작품을 넘기고 있다.
문사에게 국가와 민족을 구할 기개는 있지만 보국(報國)할 길이 없어 울분에 가득 차 노를 두드리는 것을 박자 삼아 제갈량이 그랬듯이 양보음(梁父吟)을 부르니 마음이 격동되고“, ”비처럼 눈물이 흐르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애국문인 한 분의 가슴속에 가득 찬 충의(忠義)의 감정이 남김없이 다 드러나고 작품의 뜻도 여기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사(詞)는 배를 띄워 파도를 헤치는 것을 시작으로 강 위 풍광(風光)의 묘사를 통해 경계를 열고 옛일을 추억하며 오늘을 생각하며 서사(叙事), 서정, 비평을 유기적으로 조합하여 작자 자신이 처한 상황과 국가와 민족에 대한 깊은 감정과 진실한 애정이 하나로 융합되어 그 풍격이 호방하고 비장하다(왕엄사 王儼思)
朱敦儒的词,从题材和内容看,大抵可分为两类:一类是写他早期的清狂生活和闲适心情的,另一类是写他忧国伤时,抚今思昔的。这首《水龙吟》就是属于他后一类作品的代表之一。 宋钦宗靖康元年(1126),金兵大举南侵,洛阳、汴京一带,均遭兵燹。不久,汴京沦陷。朱敦儒携家南逃,先到淮海地区,后渡江至金陵。又从金陵沿江而上,到达江西。再由江西南下广东,避乱南雄(今广东南雄县)。这首词具体写作年月虽不可考,但从词的内容看,似是他离开淮海,沿江东下金陵时所作。
词一开始就以雄健之笔描绘了一个开阔的水面境界:放船千里,凌波破浪,烟波浩淼。“略为吴山留顾”,从侧面点明他此次离开汴洛一带南来,不是为了“山水寻吴越,风尘厌洛京”(孟浩然《自洛之越》)。对明媚的吴中山水,他只是略为留顾而已。潜台词是说,他此次离乡背井,实在是因强敌入侵,迫不得已。“云屯”三句写长江水势。水府,本为星宿名,主水之官,此处借指水。“九”,泛指多数。“九江”,指长江汇合众流,浩浩荡荡,千里东流。境界何等旷远。然而这旷远的境界并未使作者襟怀开阔,反而“北客”一句转出个人身世之感。国步艰难,一身漂泊,“如今憔悴,天涯何处可销忧”。(朱敦儒《水调歌头》)“壮志未酬”,“此生老矣!”(朱敦儒《雨中花》)表现了一位爱国词人的忧愤,不是一般文人的叹老嗟卑,而是与国家兴废、民族存亡息息相关的。这正是作者思想境界的崇高处。
下文由一“念”字领起,将生活镜头拉回到作者早年在洛阳隐居的时代。伊、嵩,指洛阳附近的伊阙、嵩山,这里代指洛阳一带。巢、由,指唐尧时的著名隐士许由、巢父,这里代指作者在洛阳隐居时的朋友。词人早年敦品励行,不求仕进。在北宋末年金兵南侵之前,朝廷曾征召他到京城,拟授以学官,他坚辞不就,自我表白说:“麋鹿之性,自乐闲旷,爵非所愿也。”(《宋史·文苑传》)他满足于诗酒清狂,徜徉山水的隐逸生活:“我是清都山水郎,天教懒漫与疏狂。曾批给雨支风敕,累上留云借月章。诗万首,酒千觞。几曾着眼看侯王?玉楼金阙慵归去,且插梅花醉洛阳。”(朱敦儒《鹧鸪天》)
这就很形象地描绘了他疏狂懒漫,傲视王侯,不求爵禄,不受羁绊的性格。现在当他身遭丧乱,落拓南逃的时候,回忆起过去那种令人神往的隐逸生活,犹如南柯一梦。真是“堪笑一场颠倒梦,元来恰似浮云。”(朱敦儒《临江仙》)梦醒得如此快,觉来无处追寻。他对过去隐逸生活的向往,其意义不在隐逸生活本身,而在于他的隐逸生活带有时代特色。封建时代,文人要隐居,必须有相对安定的社会环境。朱敦儒隐居伊、嵩时,北宋社会呈现出来的尽管是一片虚假的太平景象,但毕竟还能保住中原,人民生活基本安定,比朱敦儒写作这首词的时候所过的流离转徙生活要好得多。所以朱敦儒对过去隐居伊、嵩生活的怀念,其实质是希望赶走金兵,恢复中原,回到以前的那个时代去,是爱国家、爱民族的表现。
正是这种国家民族之爱,所以下片一开始作者就站在爱国家、爱民族的高度,当此凌波南下之时,北望中原,痛感妖氛未扫,不禁发出了对英雄的渴求和呼唤。渴望有英雄出来扫净妖氛,恢复中原。上下两片,意脉相连。当时并非没有英雄。宗泽、李纲都力主抗金,收复失地,但都为投降派所阻。或忧愤成疾而死,或连遭排挤贬斥,无一得志。他想到眼前放船千里的地方,也正是三国时,蜀吴联军抗曹的故地。当年诸葛亮何等英雄,奇谋报国,指挥若定。因后主懦弱,佞臣误国,终于“尘昏白羽”,大业未成。隐喻自己也和其他英雄一样,虽有“壮心”,无奈“奇谋不用”,英雄无用武之地。这种心情,他在《苏幕遮》词中也曾表示过:“有奇才,无用处,壮节飘零,受尽人间苦。”进而由眼前的地域特点和国家形势联想到西晋灭吴的历史事实。当年吴主孙皓倚仗长江天险,以铁锁横江设防,仍然阻挡不住西晋大将王浚的楼船,锦帆冲浪,铁锁销熔,终于“一片降幡出石头”,“孙郎良苦”。历史往往有惊人的相似之处。鉴古观今,作者在词中流露出对象东吴一样偏安江左的南宋小朝廷前途的担忧。下文“但”字一转,结束上文的论史,转入到以抒情作结。词人救亡有志,报国无门,他忧愤得敲打着船桨,作为击节,象诸葛亮那样唱着“梁父吟”,心潮激荡,“泪流如雨”,无可奈何。一位爱国词人的一腔忠义之情,抒发得淋漓尽致,而词情至此,也达到高潮。
词以放船凌波开始,通过江上风光的描写拓开境界,抚今怀古,将叙事、抒情、议论有机地组合起来,将个人身世之感与对国家民族的深情挚爱融为一体,风格豪放悲壮。(王俨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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