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라디오와 만화의 울림

대만의 광복 초기에는 경제가 아직 발전하지 않아 오디오 전파는 주로 라디오 방송이었고, 1954년부터 1964년까지는 대만 라디오 방송의 전성기였으며 크고 작은 다양한 방송사가 약 80개에 달했다. 그 기간동안 무협 라디오 연극과 '무협설서(武侠说书)'는 특히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이었다.

무협 라디오 연극은 극단이 공연하는데, 보통 무협소설의 원문을 직접 따서 서술부분은 강연자가 말하고, 대화는 단원들이 책 속 인물의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원문을 다시 말하는 것과 같으며, 거의 소설 원문과 대조하면서 들을 수 있었다. 일찍이 대만의 무협 라디오 연극이 도대체 몇 편이나 방영되었는지는 현재까지 연구통계를 내놓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다만 그 중 와룡생의 비연경룡(飞燕惊龙), 풍우연귀래(风雨燕归来), 무명소(无名箫) 등의 명작이 모두 방송된 적이 있으며, 널리 호평을 받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당시 내버려 두었던 많은 일들이 다 손보기를 기다리던 사회환경에서 라디오 연극을 듣는 것은 거의 유일한 야간 소일거리가 되었다(대부분 7~9시에 방송됨). 주의할만한 것은 특히 무협 라디오 연극은 통상 민남어로 방송되었는데, 이는 전통 중국의 맛이 풍부한 무협소설이 대만에서 기반을 다지는 데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국 라디오 방송사의 점심시간 '무협설서' 프로그램은 유명한 평서가(评书家) 사마상(司马翔)이 맡아 진행하며, 혼자서 서술과 대화의 두 부분을 겸하여 표준어(보통화)로 끝까지 말했다. 1960년 와룡생의 대표작 옥차맹은 그에 의해 생생하게 표현되어 한때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훗날 사마상은 '말하는데 뛰어나게 되자 저작에 나서' 신조검려(神雕剑侣)와 고독객(孤独客)을 썼는데, 독자들이 살피지 않고 왕왕 '상(翔)'을 '령(翎)'으로 아는 경우가 있는데, 사마령의 소설로 본다면 작은 차이지만 결과적으로는 큰 오류를 일으킬 수 있다.

대만의 무협만화는 1958년 섭굉갑(叶宏甲)의 만화 제갈사랑대전마귀당(诸葛四郎大战魔鬼党)과 진해홍(陈海虹)의 소협용권풍小侠龙卷风(묵여생墨余生의 경해등교琼海腾蛟 각색)에서 시작되었다. 그 중 섭굉갑의 사랑진평(四郎真平)은 무협인물 우상화의 시작이지만, 진정으로 무협만화로 각계의 주목을 끈 것은 진해홍의 여러 작품과 그의 제자 유룡휘(游龙辉)와 남대만(南台湾)의 만화가 허송산(许松山)이었다. 1967년 대만국립편역관(台湾国立编译馆)이 검열제도를 시행하기 전, 무협만화는 전 대만에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홍의남(洪义男), 범예남(范艺南), 누추(泪秋) 등은 모두 독자들에게 친숙한 만화가였으며 100편 이상의 무협만화를 그리고 있었다. 이 만화들은 부분적으로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소재를 가져왔지만 대부분은 무협소설을 간략화해서 만들어 졌다. 그 중 진청운(陈青云)의 혈마겁(血魔劫), 잔지령(残肢令), 전가(田歌)의 무림말일기(武林末日记), 차마포(车马砲) 등 이른바 '귀파(鬼派)' 소설가들의 작품은 만화가들에게 가장 주목을 받았다. 귀파무협의 특징은 줄거리가 간단하고 인물이 많으며 대수롭지 않지만,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기운이 매우 짙어 화면으로 스릴러 효과를 내는 데 매우 적합했다. 만화의 조장으로 귀파소설도 한때 유행하였고 무협과 만화 사이의 상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대만의 만화계는 국립편역관 검열제의 억압 하에 1967년 이후 거의 정체되어 있었고 시중에 유행하던 것은 모두 일본만화의 해적판 동양만화였다. 김용 무협소설의 해금과 동시에 홍콩 황옥랑(黄玉郎)이 그린 중화영웅(中华英雄)과 여래신장(如来神掌)의 영향으로 대만 무협만화는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정문(郑问)은 중국 수묵식 화풍으로 1985년 자객열전(刺客列传)을 그린 뒤 투신(斗神)-자청쌍검지일(紫青双剑之一)과 아비검(阿鼻剑)을 잇달아 내놓아 당대 무협만화의 대가가 되었다. 그러나 현재 유행하는 무협만화는 여전히 홍콩을 주력으로 삼고 있다. 이 방면의 논술에 관해서는 이 책의 제3절을 자세히 볼 수 있으며 여기서는 군더더기로 말하지는 않겠다.

1970년대 대만의 무협 멀티미디어 종합고찰 : 무협 만화는 1967년에 시행된 검열 제도에 의해 통제되어 일찍이 겨우 숨만 남아 있었고, 무협 라디오 연극도 1972년 유명 방송극단 단장 장종영(张宗荣)이 중화TV로 옮겨간 후 점차 후계자가 없는 곤궁한 처지에 몰렸다. 무협영화는 1972년 이소룡의 정무문(精武门)이 단번에 인기를 끌면서 방향을 틀어 "쿵푸영화"로 발전했다. 1976년 초원의 유성·호접·검은 비록 무협영화를 부흥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은 단지 고룡이라는 유명자까 한 사람뿐이었다. 오직 무협 드라마만이 1970년대에 인기를 끌며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

대중매체의 번성은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무협소설의 전파에 원래 적극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제1장에서 신문·잡지 연재 무협소설에 대해 논의할 때 이미 매우 상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1970년대 무협소설의 멀티미디어적 구현은 영상, 음향(音響)과 명도(明度)의 충격효과로 가상의 협골유정(侠骨柔情)을 부드러움을 도광검영(刀光剑影),  남녀의 사랑(儿女情长)이라는 구체적인 화면으로 풀어 설명하여 의심의 여지 없이 '무협 문화'를 확산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무협 열풍 속에서 무협소설은 형식(무술의 전개 등), 내용(예를 들어 무림쟁패, 무림맹주, 무림비급 등 줄거리 패턴)부터 정신(예를 들어 협의관념) 및 무협소설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화요소(예를 들어 전통적인 충효절의忠孝节义의 도덕, 유·불·도 3가의 이념, 민간 음양오행술수 등)까지 모두 유·무형 중에 널리 확산되었고 귀에 익어 자세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상식이 되었다. 우리는 단지 무림맹주, 무림비급, 무림고수, 강호문파, 무공, '경공', 내공 등의 어휘가 일상 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 '아무리 먼 곳이라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없는(无远弗届)'심후한 영향력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사실, 무협 소설과 멀티미디어의 상호작용은 무협소설이 더 넓은 대중기반을 갖도록 확산시키는 것이고 무협소설이 더 풍부한 표현 방식을 갖도록 변형시키는 것이며, 이는 당연히 무협 문화의 대중화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기괴한 것은 이러한 확산과 변형은 역으로 무협소설의 창작에 예상치 못한 손실을 입혔다는 것이다. 이 손실의 원천은 의심할 여지 없이 TV 무협 드라마에서 온 것이다.

무협 드라마의 특징은 '장기간 방영, 회차별로 궁금함을 남기는' 방식을 통해 시청자들이 다음 회를 계속 보도록 하는데 있다. '장기간 방영'은 지속적인 영향력을 만들 수 있으며 시청자들이 항상 매일의 일과를 마음에 두고 반드시 시간에 맞춰 끝내도록 한다. 그리고 방송국은 8시 황금 시간대를 선택하여 방송하는데, 바로 전통적으로 가족이 저녁식사를 함께 즐기는 시각에 맞춰 의심할 여지 없이 매일 상기시키고, 시시각각 신신당부하는 강력한 효과가 있으며, 게다가 각 시간대의 집중적인 홍보를 더해 시청자들로 하여금 잊어버릴 시간이 없도록 하여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둘 수 없도록 하는 효과를 만든다. 무협소설은 원래 장편이라는 것이 장점이므로 40부작, 60부작의 드라마로 각색해도 충분히 여유가 있었는데 협사행(侠士行)과 보표(保镖)는 222부작, 256부작으로 오랜 시간 사람들의 마음을 적셔온 큰 힘을 드러내었으니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회차별로 궁금함을 남기는' 방법은 고전 장회(章回)소설의 '뒷일이 어떨지 알고 싶으면 다음 회의 설명을 보시오'라는 대목(역주 : 이야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흥미를 북돋우기 위해 그 회를 마치는 부분에 삽입됨)을 십분 활용해 매회 엔딩마다 의도적으로 현안으로서 미해결된 발전 가능성을 남겨 시청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한껏 기대와 흥미를 가지고 TV 앞에서 끝까지 보도록 만들었다.

무협소설의 이야기는 곡절이 있고 스토리가 기이해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 공간으로 안성맞춤이다. 1982년 홍콩 드라마 '초류향'은 고룡의 장기인 추리와 탐정 스토리를 바탕으로 풀어내 한때 대만 전역을 풍미(风靡) 했는데, 이것이 바로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무협 드라마는 이 두 가지 모델의 교차 작동 하에 빠르고 보편적으로 광범위한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드라마 시청은 민중들의삶에서 없어서는 안될 오락이 되었다. 그 깊고 광범위한 영향은 비길 데가 없었다! 고구봉(高久峰)은 일찍이 '초류향' 드라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TV의 '초류향'은 대만에서 최초로 방영된 홍콩 드라마로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일련의 사회 현상을 만들었다. '초류향'이 방영될 때마다 거리의 행인이 현저히 감소하고 택시도 영업을 하지 않았으며 거리에는 '초류향' 또는 '무화(无花)'라는 이름을 가진 많은 식당이나 찻집이 나타났다. 주요 매체는 '초류향' 현상에 대해 자주 토의했고, 국내 배우들은 홍콩 드라마 방송이 자신들의 업무권리에 영향을 미친다고 항의했으며 입법위원회는 입법원에 '홍콩 드라마 내용이 적절한지에 대한 질문'을 제출했다. '초류향'의 주제가인 '천산을 나홀로 간다(千山我独行)'는 심지어 장례 때 악대가 연주하는 노래가 되기도 했다.

"모든 일을 멈추고 무협드라마부터 보자"!라는 말에서 무협 드라마의 매력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자 무협 드라마는 블랙홀이 되어 수 많은 원래 무협소설의 '충실한 독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무협 드라마의 '충실 시청자'로 바꿔 놓았다. 독자에서 시청자로의 전환은 문자의 감화력이 점차 사라지고 이를 대신한 것이 감각기관의 자극에 직접 어필하는 이미지와 음성이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무협문화 중의 여러 요소는 여전히 영화와 음성을 통해 퍼져 나갈 수는 있지만, 반드시 무협 소설을 읽어야만 할 필요는 없다. 텔레비전 무협 드라마가 등장한 후, 무협소설의 독자들은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는데 상상력을 사용하고 차분하게 읽어야만 하는 무협소설은 결국 직접 눈에 들어와 곧바로 감각기관에 자극을 얻는 TV 무협 드라마를 당해낼 수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무협에 대한 알고 있는 것은 뜻밖에도 완전히 무협 드라마에서 나온 것이다.

독자가 점차 사라지자 무협 작가들도 분위기를 잘 읽고 방향을 전환했다. 와룡생, 제갈청운 등의 유명 작가들은 잇달아 방법을 바꿔 각본을 맡았고 무협 소설의 창작에 대해서는  소홀해졌다. 예를 들면 와룡생은 1970년 이후 창작량이 급감하고 작품의 질도 급격히 나빠졌는데, 1972년부터 신주호협전(神州侠传傳)의 각본을 쓸 때 당시 중앙일보에 연재하던 동명의 소설을 취하여 각본으로 고쳤다. 왼손으로 책을 쓰고 오른손으로는 각본을 썼으니 양손이 서로 싸우는(两手互博) 격이라 마음이 분산되었다! 무협소설은 자연히 강물이 날마다 아래로 흘러가는 것처럼 점점 멀어지고 점점 소리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