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arch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4

무협 일반 2016. 10. 7. 18:22 Posted by 비천호리

의외로 북방에서는 주정목이 나타나 남파 고명도의 풍격을 참신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는데 명망이 있으면서 살아남은 매우 드문 일로서 남파의 풍격을 다시 뛰어나게 빛나도록 하였다. 당시 독자의 마음속에서 주정목의 지위는 북파 4대가만 못했는데 그 주요원인에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 그에게는 <촉산검협전>, <십이금전표>, <응조왕>, <학철 5부작> 같이 충분히 특색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풍격을 모아 대성(大成)한 장편대작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의 특별한 주의를 끌 수 없었고 만약 4대가에게 단지 <만황협은>, <투권>, <무림협종>, <낙양호객(洛陽豪客)> 류의 일반 장편작품만 있었다면 그들이 독자에게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인지 여부도 대성(大成) 문제이다. 둘째, 주 씨의 작품은 전편에 흐르는 기세에서 4대가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는데 작고 정교함(小巧) 혹은 청아하고 수려함(淸麗)에 가깝고 웅혼함과 깊음이 조금 적어 어떤 때는 어느 정도 소심함을 드러내고 약간은 으스대는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의 소양, 재능과 기백이 얼마간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약 17부이고 그중 <칠살비(七殺碑)>가 가장 유명한데 이 작품은 1949년 봄에 출판되었고 아마도 그의 작품 중 압권(壓卷)일 것이다. 60~70년대 이래 주정목은 대만, 홍콩 연구자에게 중요시 되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섭홍생이 “주 씨가 일찍이 처음으로 백화(白話) 장회(章回)소설(몇 개의 회로 나누어 이야기를 서술한 장편소설)을 시작하였고 그 소설의 필법, 내용이 50년대 홍콩, 대만의 무협작가들에게 많이 모방되었으며 그 때문에 ‘신파무협소설의 시조’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말한 바와 같다. 구파무협소설의 흐름이 가라앉은 후 10여년 만에 주 씨가 대만과 홍콩 지기(知己)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는 바, 천리 떨어진 곳에 지음(知音)이 존재하였으니 불행 중 크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춘우는 주정목에 비하면 더욱 불행하였는데 40년 이래 줄곧 푸대접을 받았고 점차 세상에서 잊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30~40년에는 그도 무단(武壇)에서 지위를 다투던 명작가였다. 서 씨도 자기의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설서(說書)” 느낌이 매우 짙었고, 늘 소설을 시작하면서 설서인의 말투로 첫 등장인물이 일단(一段)의 첫 대사를 말하고 또한 표(表), 백(白), 평(評)을 운영하여 하나로 융합한 창작기교로 희극적인 장면을 그려내는데 매우 뛰어났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의 스토리가 일반적으로 복잡한 편은 아니었지만 변화가 많고 표현을 완곡하게 쓸 수 있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만 하였고 더욱이 그의 작품에는 특히 민간에서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정취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였다. 서 씨의 작품은 대략 12종이 있는데 그중 <벽혈원앙(碧血鴛鴦)>이 비교적 유명하다.
 
구파무협소설은 30여년간 성행하여 쇠하지 않았고 대개 신문·잡지에 연재되어 그 작자 및 작품의 수량을 정확하게 통계 내기는 어렵지만 책으로 인쇄된 것은 8백여 종, 작가는 2백여 명이었다. 40년대 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망소루주(望所樓主) 등 상당한 재능을 갖춘 약간의 신예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원인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한 세대의 대가(大家)로 미처 성장하지 못하였고 구파무협소설 예술의 고봉(高峰)은 북파 4대가의 손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나는 북파 4대가의 성취를 말하지만, 결코 그들의 작품이 완전하여 결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의 작품은 매 편이 모두 좋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장 좋은 작품 중에도 매장(每章), 매절(每節)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이는 창작기교의 문제는 전혀 아니며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먼저 사상(思想) 측면에서 보면 결코 진정으로 무협소설의 예술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다. 청말(淸末)부터 민국 초기 이래 서방의 문예이론이 물밀듯이 중국으로 들어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서방문예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도록 만든 동시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전통회화(繪畵), 한방의학을 부정하는 언론이 수십년 동안 유행하여 약해지지 않았고 소설 방면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에 이미 매우 유행한 관념이 되어 강대한 사회 여론적 압력을 형성하였고, 무협소설은 더욱 더 뭇 사람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북파 4대가는 사상적으로도 이러한 사조(思潮)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협소설 창작은 대부분 생활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지 내심으로는 결코 이러한 종류의 일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우는 평생 무협소설을 썼던 것을 자신의 치욕으로 생각했고, 환주루주는 심지어 이전에 신문에 게재한 저작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였다. 정증인은 스스로 “내가 쓴 이것은 문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왕도려도 “고상한 지위에 오르기 어렵다”고 자인하였다. 이러한 사상 상태는 그들 작품의 예술적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먼저 신문·잡지에 연재되었는데 종종 신문·잡지의 판매 상황에 따라 요구를 받으면 대충 결말을 짓거나 혹은 길게 늘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계획할 수 없었고 이는 쉽게 구성이 산만하거나 혹은 용두사미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북파 4대가의 당시 생활형편이 모두 좋지 못해 종종 동시에 몇 부의 연재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바빠서 숨돌릴 사이도 없을 정도였다. 하루 만에 매 작품별로 각각 1천자 가까이 써야 했고 이리하여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그럭저럭 버티는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환주루주의 <만황협은>은 시작 부분 2집(集)까지는 아주 잘 썼으나 3집 이하는 명백하게 <야수폭언(野叟曝言)>을 그대로 베껴 그럭저럭 문장을 만들었고, 백우의 약간의 작품은 심지어 근본적으로 그의 자필(自筆)이 아니기도 하였다. 백우가 후에는 무협소설 쓰기를 매우 싫어하자 출판상이 다른 사람의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가 서명(署名)해 발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는 늘 집안사람의 간청에 따라 생계를 잇기 위하여 황급히 한 번 들춰본 후 본심에는 맞지 않지만 자기의 명의로 출판하는데 동의하였던 것이다. <용설검(龍舌劍)>, <경홍기(驚鴻記)>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정증인은 한창 쓰고 있는 소설을 간단한 표로 늘어 놓고 벽에 부착한 후 출판담당자가 찾아와 원고를 재촉하면 그는 담당자를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고는 표에서 어디까지 썼는지 좀 보고는 황급히 붓을 들어 한 단락을 이어 쓴 후 이를 알렸다. 그들이 바로 이러한 정신과 생활의 이중 압박 하에서 창작을 하면서도 적지 않은 명작을 써냈는데 이는 실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3

무협 일반 2016. 10. 6. 20:46 Posted by 비천호리

백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뚝 솟은 정증인은 진정으로 중국 기격(技擊)무협소설 일파를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이다. 비단 민국 무협소설로 봤을 때 이러할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처럼 중국무술에 전념하여 중국무술의 각종 문파, 무술동작, 초식을 이와 같이 해박하고 진실되며, 생생하고 멋들어지게 써낸 사람은 없다. 정증인은 1938년에 <무림협종(武林俠踪)>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1년, 그의 대표작 <응조왕(鷹爪王)>이 북경 <369>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만이 갖추고 있던 특색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응조왕은 정 씨 무협소설의 특색을 모은, 크게 성공한 대표작이며 그것은 거친 호기(豪氣), 다채로운 무술과 스릴 있는 스토리를 일체(一體)로 녹여 기격무협소설의 완전한 형태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무술은 비단 고대의 실용적 전투기술인 것만은 아니며 그것은 일찍이 이미 무도화(舞蹈化)되어 사람들의 심미(審美) 대상으로 변하였는데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장(項莊)의 무검(舞劍),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기무(剑器舞)는 모두 저명한 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무술 가운데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인,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화권수퇴(花拳繡腿)” 일파(一派)가 진화해 나왔고 심지어는 동작의 명칭도 모두 시적 정취(情趣)를 띠게 되어, 예를 들자면 “연자천운(燕子穿雲)”, “청정점수(蜻蜓點水)“, ”백학양시(白鶴亮翅)“, ”단봉조양(丹鳳朝陽)“ 등이며, 이러한 명칭은 독자의 마음속에 일종의 시화(詩化)된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결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중국무술 자체가 매우 높은 심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히 문자로 묘사해낸 것은 형상을 직접 보는 것보다 더욱 풍부한 연상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정증인의 성공은 처음으로 이 방면의 예술적 매력을 충분하게 발휘했다는데 있다. 그는 무술과 험난한 상황(險境)을 결합해 내는데 아주 뛰어나 무술이 작품 줄거리에 유기적인 구성부분이 되도록 하였다. 정증인도 필치를 사회생활로 뻗기는 했지만 그는 백우처럼 그렇게 광범위하게 세상 인심과 물정에 미치지는 않았고, 집중적으로 방회(幇會)의 내막을 펼쳐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그 자신의 경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정 씨가 대대로 살아온 천진 서고(西沽) 일대는 북운하(北運河)와 자아하(子牙河)에 바로 인접해 있어서 남쪽의 조운(漕運)이 북경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상업도시였고, 청 말에 이 일대는 곡물가게가 밀집한 곳 가운데 하나이면서 ”짐꾼(腳行)“, ”건달(混混兒)“이 출몰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정 씨는 직접 보고 들어서 암흑가에 대해 비교적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필하(筆下)에서 암흑가의 으스스한 모양과 잔혹하고 악랄함, 신비한 의례(儀禮)를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장의 풍격으로 보면, 정 씨에게 환주루주와 백우 같은 그런 문학적 재능은 없었고 그의 문장은 그다지 정미(精美)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주로 두 가지 기본원인에 말미암은 것으로, 하나는 평서(評書)의 영향이 아주 깊었고, 둘은 그가 천진 방언으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술 묘사에 뛰어났고 이야기의 변화를 잘 제어할 수 있었으며 또 일종의 거친 기세가 있었기 때문에 족히 독자를 끌어들일만 하였다. 그의 결점이 장점을 가리지 않아 탁월하게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독자적으로 하나의 파를 형성하여 환주루주, 백우와 함께 높은 명성을 누렸다.
 
정 씨는 일생동안 90부에 가까운 무협소설을 썼는데 대부분이 10만자 전후의 중편이었고 이야기나 인물이 서로 관련되어 있어 모양이 연환투(連環套,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연결된 둥근 고리) 같이 큰 고리에 많은 작은 고리가 연결되어 있고 작은 고리끼리는 또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한 작품에서 완결되지 않은 채 남겨둔 약간의 일을 다른 작품에 넘기고, 그 작품의 이야기 앞뒤 관계는 또 많은 다른 작품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상호간 대단히 복잡한 관계가 있어 한 종류를 본 독자로 하여금 다시 다른 종류를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독자는 한 두 종류를 본 후에는 스토리, 인물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다른 종류를 보면 쉽게 매료되어 시작 부분부터 곧바로 순조롭게 읽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요민애가 구상한 연환격(連環格) 소설예술 구조의 매력을 매우 멋들어지게 발휘하였다.
 
역시 1938년에 화를 피하려고 청도(靑島)로 옮겨 살던 왕도려(王度廬)는 그의 성명작(成名作) <보검금채(寶劍金釵)>를 발표하여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또 <검기주광(劍氣珠光)>, <학경곤륜(鶴驚昆侖)>, <와호장룡(臥虎藏龍)>, <철기은병(鐵騎銀甁)>을 썼다. 스토리가 상호 연계된 이 소설은 바로 전세계 독자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학철 5부작(鶴鐵五部作)인데 이야기의 발전 순서에 따라 <학경곤륜>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보검금채>, <검기주광>, <와호장룡>, <철기은병>이다. 이 시리즈 소설은 왕도려의 기초를 확립하고 작가로서의 경력을 다지기 시작한 작품이며 소설에서는 무림호협(豪俠) 세 쌍의 애정과 비극을 그렸는데 이야기의 변화가 매우 풍부하고, 호기로우면서 애절하고, 슬프고 구성지게 씌어져 성공적으로 애정무협소설의 완전한 형태를 창조하였다. 왕 씨 이전에 무협소설에서 혼인, 연애 문제를 언급한 것이 결코 드물지는 않았지만, 혹은 일종의 끼워넣기로 구색을 맞추었고, 혹은 사상적 탐색과 표현이 깊지 않았고, 혹은 무협과 애정 상호간에 동떨어져 내적인 연계가 결핍되어 모두 완전한 형태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왕도려의 애정무협소설은 이상의 여러 가지 결함을 극복하였는데 그는 처음으로 호협의 애정 생활을 소설 묘사의 중점으로 삼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동시에 비극을 초래한 근원이 봉건적 관념에 있다는 것을 힘써 드러내어 작품의 반봉건적 사상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비극을 초래한 원인은 외부의 간섭 혹은 방해(홍루몽에서 그러는 것처럼)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의 봉건관념에 그 책임이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자아의 괴멸인데 예를 들어 이모백과 유수련의 비극적인 연애는 바로 이모백 자신의 봉건관념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그렇지만 왕 씨의 글에서 이모백에 의해 지켜지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봉건관념 혹은 일반적인 봉건습속(習俗)이 아니고 협객으로서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신성한 규범이어서 그는 유수련의 깨끗한 명성(淸名)을 훼손할 수 없었고 더더욱 맹사소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의기(義氣)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심리는 오랫동안 무예가의 덕목(武德)과 협의도(俠道)의 훈도(薰陶)를 받아온 결과였다. 사람마다 모두 이모백이 잘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람마다 그가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발을 디딘 남자 대장부이며 진정한 협의도(俠義道)이고 경모(敬慕)할만한 대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각(自覺)적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러운 심연(深淵) 속에 던져 넣었는데 이것은 극히 큰 자제력과 희생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왕도려는 무술 묘사에 뛰어나지 않아 이 방면에 있어서는 무술에 정통한 정증인에 비하여 한참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종이 위에서 전쟁을 논한(紙上談兵)” 백우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 씨 소설 중의 협객은 모두 일종의 얼굴에 확 스쳐오는 호기(豪氣)로움을 주는데 이는 어쩌면 바로 왕 씨의 특색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그는 무술과 협행(俠行)의 표면적인 묘사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무협정신을 등장인물의 혈액과 영혼으로 변하게 하여 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함으로써 무협정신의 인물에 대한 영향의 복잡성을 써냈다. “학철 5부작”은 왕도려의 대표작이지만 그의 흥취는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타향살이를 하면서 무협소설을 썼고, 늘 고향 북경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풍토(風土)와 인정(人情)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풍토와 민심에 편중된 또 다른 약간의 무협소설은 달리 하나의 정취를 드러내었다. 예를 들면 <수대은표(繡帶銀鏢)> 등도 독자의 많은 사랑을 얻었다. 왕도려의 애정무협소설은 앞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준을 크게 초월하였고 이 방면에 있어서 그는 개산입파(開山立派)의 일대 종사이다. 왕도려의 민국 통속소설사에서의 지위 내지는 전체 중국문학사에서의 지위는 그의 애정무협소설로 다져진 것이다.
 
30~40년대에 무단(武壇)을 웅패(雄覇)하고 한 시대의 문학을 이끌었던 사람은 자연 이, 궁, 정, 왕의 북파 4대가를 먼저 말해야 하겠지만 그 외에도 4대가와 같은 시기에 나아갔고, 무단에서 승부를 다툰 중요한 작가 두 분이 더 있는데 그들은 바로 주정목과 서춘우(徐春羽)이다.
 
주정목은 일찍이 천진 전화국에서 환주루주와 함께 일하였고 환주루주가 <촉산검협전>을 써서 유명해지자 주 씨는 그것을 보고 자신도 손이 근질거려 <철판동파록(鐵板銅琶錄)>을 써 천진의 <평보(平報)>에 발표하였으나 독자의 주의를 끌지는 못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환주루주를 모방하였으나 재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후에는 고명도의 방법으로 바꿔 무협, 애정, 모험 세 가지를 하나로 합쳤고, 비로소 두각을 나타냈다. 주 씨가 창작의 성숙기에 도달한 후에는 그의 문장실력과 이야기 구성의 기교는 이미 고 씨를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방의 흔적을 알아내기 쉽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 우리들이 고명도와 북파 4대가를 남파와 북파의 표준으로 구분할 때 주정목을 둘 사이에 놓고 비교하면 쉽게 그의 남파의 풍격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남파의 풍격을 요점만 골라 얘기하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강개하여 비장(悲壯)한 노래를 부르는 영웅의 호기는 적고 지분(脂粉) 향의 고상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농후하다. 둘째, 상상을 달리는 웅대한 모험과 두려움이 적고 세밀하게 짜여진, 작고 정교한 기궤(奇诡)함이 많다. 셋째, 새로운 명사(名詞)를 즐겨 사용한다. 남파 애정무협소설은 고명도 이후에는 어느 남방 작가의 영향도 고 씨와 함께 거론할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고 씨를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2

무협 일반 2016. 10. 5. 20:30 Posted by 비천호리

북파무협소설 4대가 중 제일 먼저 우뚝 솟은 사람은 환주루주이다. 그는 1932년 7월에 <촉산검협전(蜀山劍俠傳)> 발표를 시작하여 1948년까지 50집(集)을 다 내놓음으로써 일단락을 지었다. 전후로 17년이 걸렸고 이어 쓰고 이어 발표하였는데 장기간 흥성하고 쇠하지 않아 민국 통속소설사상 극히 드문 특별한 사례이다. 환주루주는 그만의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연의 풍광(風光)을 매우 좋아하여 명승고적을 두루 돌아보았고 이것은 그의 소설 창작의 성공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으며 자연 풍광미에 의해 격발된 시정(詩情)은 그를 성공의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환주루주의 성공은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의 탐색과정이 있었다. 그는 무협소설을 써달라는 요청에 응하면서 내심으로는 도리어 자연풍광이 격발한 시정을 품고 있었으나 현실의 무협 스토리는 언제나 자연풍미와 천의무봉(天衣無縫)하게 결합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주관적인 바램과 객관적인 조건을 조화되도록 할 수 있을까?
 
그가 필치를 신화(神話)의 경계로 깊이 뻗게 되어서야 비로소 가장 훌륭한 돌파구를 찾아내게 되었고, 명산대천(名山大川)의 웅장함 혹은 빼어난 아름다움은 신화(神話) 이야기의 기묘함과 일체로 융화되어 양자가 서로 도와 장점을 더욱 잘 돋보이게 하였다. 그러니까, 환주루주가 무협소설 창작을 개시하였을 때 처했던 주관적, 객관적 조건으로 말하자면 신괴(神怪) 무협소설 형식을 채용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필연적이었으며 이것이 그가 찾아낼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이점을 이해한다면 “황당하다(荒誕)”는 두 글자로 경솔하게 그의 중국문학 사에 있어서의 특수한 공헌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와 신화를 하나로 융합하는 시적인 경계는 절대로 쉽게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것은 작자가 매우 풍부한 상상력을 갖추고 있을 것을 필요로 하는데 환주루주가 바로 이러한 재능을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환주루주도 단지 상상에만 의지하였던 것뿐만은 아니었고 이 상상은 해박하고 심후한 학식의 기초 위에 세워졌으며 고서를 널리 읽고, 전고(典故)를 숙지하고 있는 외에도 그는 발길이 이른 곳의 풍속에도 유의하였다. 그런 까닭에 그의 소설은 절대로 단지 “신비롭고 기이함(神奇)”, “황당함(荒誕)” 으로 승리한 것만이 아니라 그 포용량(包容量)도 매우 커서 이를테면 사천((四川), 호남(湖南), 운남(雲南), 귀주(貴州) 민간의 혼례와 장례, 식용물(食用物), 의약(醫藥), 무고(巫蠱, 저주로 다른 사람을 해하는 사술) 따위를 때때로 아무거나 집어들어 붓을 움직이더라도 매우 흥미 있는 내용이 되어 마치 산음도(山陰道, 會稽城 서남쪽 교외의 풍경이 아룸다운 길)를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을 다 볼 수 없듯이 독자로 하여금 무궁무진한 흥미를 느끼도록 만든다. 환주루주 필하(筆下)의 검선(劍仙)은 대부분 도교도(道敎徒)이고 그의 작품의 풍격도 상당히 (붕새가 남해로 옮겨가려 하는 때에) “날개가 물 위를 쳐 3천리에 이르고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9만리를 날아오른다(水擊三千里 摶扶搖而上者九萬里)”는 유풍(遺風) 있으며, 사상(思想) 상으로도 약간은 “(저 가장 올바른 길을 가는 사람은)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않는다(不失其性命之情)”의 의미가 있어 자연히 진정(眞情)이 드러났고 소설 중에 나오는 약간의 불교도들조차도 이러하였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은 작자 자신이 감정을 중요시하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그밖에 민국 무협소설 작가 가운데 환주루주는 어쩌면 중국 전통문화의 특색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었던 작가일지도 모른다. 그의 소설에서는 시종 유(儒), 도(道), 선(禪)의 중국적 특색을 유지하고 있고, 그의 그 평이하고 알기 쉬운 반문언(半文言) 반백화(半白話) 문장의 풍격(風格)에도 조금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환주루주는 일생 동안 30여 부의 무협소설을 썼는데 그의 뛰어난 재능은 <촉산검협전>과 <청성십구협(靑城十九俠)> 두 부의 후세에 전하는 대작 중에 집중적으로 표현되었는데 일반적으로 사실주의적인 무협소설은 이러한 자연적인 시경(詩境)에 도달하기 매우 어려웠으며 이것은 몇 수의 시를 끼워 넣는다고 해서 결코 시화(詩化)”로 가장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환주루주를 “재능이 넘친다(才華橫溢)”고 칭찬한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니다. 그의 소설을 다른 사람이 모방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이 바로 분명한 증거이다.
 
환주루주의 뒤를 이어 백우, 정증인, 왕도려가 1938년 손을 맞잡고 일어나 북파 무협소설의 사회적 영향력을 매우 크게 확대하였다. 백우는 일찍이 1927년에 무협소설 창작을 시험해보았는데 장한수(張恨水)의 초대에 응하여 <청림칠협(靑林七俠)>을 썼으나 독자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고, 30년대 중기에 또 연재 무협소설 <황화겁(黃花劫)>을 써서 “행매(杏呆)"라는 필명으로 발표하였으나 사회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다. 항일전쟁이 발발한 후 백우는 생활의 압박으로 인하여 다시 예전에 익혔던 솜씨를 발휘하여 1938년 2월부터 천진의 <용보(庸報)>에 <십이금전표(十二金錢鏢)를 연재하였고 비로소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 소설은 최초에 정증인이 초안을 잡은 후 백우의 첨삭과 윤색을 거쳐 발표되었으나 제20회의 반 정도를 썼을 때 정 씨에게 다른 생계수단이 생기는 바람에 동시에 돌볼 수 없게 되자 비로소 백우가 독자적으로 이어받아 쓰게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이 소설 첫머리의 “겁표(劫鏢)” 부분에는 여전히 정 씨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서(全書)는 모두 17집(集)이며 제15집, 제16집은 천진의 <천성보(天聲報)>에 연재되었는데 이름을 <표조청봉(豹爪靑鋒)>으로 바꾸었다. 제17집이 1946년 천진의 <건국일보(建國日報)>에 연재될 때 다시 이름을 <풍림표변기(豊林豹變記)>로 바꾸었다.
 
<십이금전표>가 백우의 출세작이기는 하지만 백우 무협소설의 특색을 가장 잘 대표하는 것은 응당 <투권(偸拳)>과 <연표기(聯鏢記)>여야 한다. 민국 무협소설 작가 가운데 환주루주가 중국전통 문화의 특색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백우는 분명히 “5·4” 신문화운동의 영향을 더욱 많이 받아 소설에서 현실주의의 방법을 구현하고 현실 인생에 근거하여 사람과 일을 묘사하려고 노력하였던 사람이다. 백우는 19세에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사람들에게 냉대를 받을 대로 받았기 때문에 세상이 불공평하고, 또 그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일종의 눈물을 머금은 유머를 일상적으로 사용하였고, 상반되는 문구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본래의 생각을 표현하고(正話反說), 비극을 기쁘게 씀으로써 엄숙한 문자의 표면상의 뜻의 뒷면에 바로 사회에 널리 퍼져 존재하는 황당한 현상을 두었던 것이다. 귀중한 것은 백우의 야유(揶揄)와 풍자는 그 중용(中庸)의 도를 잃지 않아 <관장현형기(官場現形記)> 같은 부류의 약간은 도를 넘은 작품에 비해 더 함축적이다. 그 후에 백우를 모방한 얼마간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도를 넘어서 야유가 악의에 찬 조롱으로 흘렀고, 백조를 새기다가 실패하여 집오리를 닮는다든가(刻鵠類鶩), 범을 그리려다 개가 되었다든가(畵虎成犬) 하여 함께 놓고 말할 수 없었다.
 
백우는 결코 적나라하게 독자에게 설교하지 않았고 깊이 파고 들어 사람들의 인심과 세상 물정을 전사(傳寫) 하였다. 만물의 형상에서 방법을 구하고 다른 사물을 빌어 본뜻을 기탁(寄託)하여 독자에게 음미할 수 있는 언외의 뜻(言外之意)을 남겨 주었고, 함축하고 있는 예술정취가 매우 풍부하였기 때문에 그의 무협소설을 읽으면 저절로 자신의 생활경력을 떠올리게 하였고 그리하여 작자의 정신과 소통하고 공명(共鳴)을 일으켜 무협소설 그 자체에 일종의 예술적 매력을 생기게 하였다. 마치 환주루주가 필치를 신화에 뻗은 것처럼 백우는 필치를 사회를 향하여 뻗었는데 그의 주관적인 조건과 객관적인 환경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일 수 있으며 일종의 필연적인 것이었다. 백우가 사회의 어두운 면을 쓴 것은 환주루주가 자연풍광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억누를 수 없는 열망이었고 한 번 기회가 있으면 그것을 빌어 자신의 진의를 표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환주루주가 억누를 수 없었던 것은 애정이었고 백우의 그것은 도리어 한(恨)이었다. 환주루주의 신괴무협소설은 많은 사람들에게 “지극히 황당하다(荒誕至極)”고 배척받았지만 세심한 독자는 스스로 그 중에서 그의 현실 인생에 대한 애정이 갈수록 두터워지는 것을 깊이 음미할 수 있었다. 백우의 사회무협소설은 완전히 현실의 세상인심과 물정에 발을 붙이기는 했지만 세심한 독자는 그 중에서 그가 세상사의 황당함을 드러내 보였다는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단지 표현하는 방법이 같지 않았을 따름이다.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1

무협 일반 2016. 10. 5. 08:39 Posted by 비천호리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 중에서
장공생(張贛生)
 
중국의 무협소설은 역사가 유구하지만 민국 건립 전에는 결코 “무협소설”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송(宋), 원(元) 양대에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을 “호협류(豪俠類)"에 포함시켰고, <몽양록(夢梁錄)>과 <취옹담록(醉翁談錄)>은 “박도(朴刀)”, “간봉(杆棒)” 항목에 분류하였다. 명대에 이르러 단성식(段成式)이라는 이름으로 가탁(假托)하여 저술된 <검협전(劍俠傳)>, 다시 내려와 청 광서 초에 이르러 <삼협오의(三俠五義)>가 간행되고 달리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드디어 같은 유형의 작품을 “협의소설”이라고 불렀다. 조금 후에는 또 “협정소설(俠情小說)”, "기협소설(奇俠小說)“, ”협용소설(俠勇小說)“, "의협소설(義俠小說)”, "임협소설(任俠小說)“ 등의 명칭이 있게 되어 호칭이 매우 혼란하였지만 유독 ”무협소설“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협(武俠)”이라는 한 단어는 최초로 <소설총화(小說叢話)> 가운데 정일(定一)의 "<수호(水滸)>를 논하다"(광서 30년, 1904년 간행)에 보이는데, 글 중에서 말하길 “무협의 모범을 남겨 사회로 하여금 그 혜택을 받도록 한 것은 실로 시내암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4년 후 (광서 34년, 1908년) 각아(覺我)는 <나의 소설관(余之小說觀)>에서 “일본 蕞爾三島가 그 국민은 모두 무협(武俠)으로 자임하고..... 이 <무협의 일본(武俠之日本)>은 19판(版)이고..... <무협함대(武俠艦隊)>..... 책이 발간되면 빨리 보려고 서로 앞을 다툰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번역된 <무협함대> 중에서도 여러 차례 “무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민국 4년(1915년)에 이르러 상해출판의 <금요일> 제38회(2월 20일 출간)에는 소초(小草)가 지은 <무협원앙(武俠鴛鴦)>이 실렸고, 9개월 후에는 <소설대관(小說大觀)> 제3집(12월 1일 출간)에 또 임서(林紓, 琴南)의 단편 <부미사(傅眉史)>가 실림으로써 비로소 분명하게 “무협소설”로 표방하였다.
 
그 후 “무협”이라는 단어는 정기간행물의 이름으로 사용되어 평금아(平襟亞)가 편집한 <무협세계>가 있었고, “무협소설” 이 전용명칭은 점차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섭홍생은 일찍이 이로부터 "만약 단지 전용명칭으로 명명한 것부터 말하면 중국의 '무협소설'을 민국의 신생문학 유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0년대 초, 대륙과 대만은 각자 이전의 무협소설을 조사·금지하였고 홍콩, 대만에서는 한 무리의 새로운 무협소설 작가가 출현하여 그들은 과거와는 다른 사회환경 하에서 작품을 썼고 그 작품도 새로운 특색을 갖추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드디어 1912년에서 1949년 동안의 작품을 '구파무협소설'이라고 부름으로써 홍콩, 대만의 '신파무협소설'과 구별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구파무협소설의 1912년부터 1949년까지 38년간의 발전 역정은 대체로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923년 이전에는 무협소설 창작의 저조기이다. 민국 건립 초기에 원세개(袁世凱)가 집권하면서 복고 풍조가 성행하였고 문언문 무협 창작이 한 차례 다시 일어났으나 끝내는 눈앞을 스치는 연기처럼 얼마 되지 않아 곧 사라졌다. 이 한 시기의 백화무협소설로 비교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겨우 섭소봉(葉小鳳)의 <고수한가기(古戍寒笳記)> (1914년-1915년 <七襄>에 최초 발표)가 있었는데 창작 사상의 기본은 만청(晩淸)의 풍격을 답습하였고, <열혈흔(熱血痕)> 부류의 작품과 유사하였다. 원세개 사후 민국 10년(1921년) 전후에 이르기까지 무협소설의 창작은 점차 활기를 띠어갔는데, 예컨대 백하담수(白下談叟)의 <옹정검협기안(雍正劍俠奇案) (1919년)>, 주하천(朱霞天)의 <청검벽혈록(靑劍碧血錄, 1919년)>, 이정이(李定夷)의 <진해영웅전(塵海英雄傳, 1919년)>, 강협혼(姜俠魂)의 <강호삽십육혼(江湖三十六魂, 1920년)>, 이함추(李涵秋)의 <녹림괴걸(綠林怪傑, 1921년)> 등인데 다만, 모두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는 어려웠고, 당시의 소설 영역은 여전히 사회소설과 애정소설의 천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남상북조(南向北趙)”의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비로소 구파무협소설의 창작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고 중국무협소설 대번영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되었다.
 
바로 1923년에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 向愷然)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조환정(趙煥亭)도 장편대작 <기협정충전(奇俠精忠傳)>을 발표하였다. 이 두 편의 무협소설은 각자 특색이 있고 당시 일반 무협소설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독자로 하여금 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두 작품은 서로 비추어 빛남으로써 민국 무협소설의 첫 번째 절정을 열었다. 이 두 부의 소설은 모두 이어 써 이루어진 것으로 1923년에 발표하여 1927년 전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으니 5년의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그 작품들이 열어젖힌 절정도 지속되어 쇠하지 않았다. 그 무협소설의 절정 중에서 상개연과 조환정은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주장(主將)으로서 그들의 새 작품이 연이어 세상에 나왔는데, 예를 들면 상 씨의 <근대협의영웅전(近代俠義英雄傳)>, <강호괴이전(江湖怪異傳)>, <옥결금환록(玉玦金環錄)>과 조 씨의 <청말기동대협은일관일사(淸末畿東大俠殷一官軼事)>, <은파삼웅전(殷派三雄傳)>, <영웅주국기(英雄走國記)>, <곤륜협은기(崑倫俠隱記)> 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성공은 많은 소설작가들이 무리로 일어나 모방하여 분분(紛紛)히 무협소설의 창작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면 요민애(姚民哀)의 <산동향마전(山東响馬傳)>, 심우종(沈禹鐘)의 <유협신전(遊俠新傳)> (이상 1923년-1924년), 장명비(張冥飛)의 <강호검객전(江湖劍客傳)>, 조초광(趙苕狂)의 <강호괴협(江湖怪俠)>, 풍옥기(馮玉奇)의 <원앙검(鴛鴦劍)> (이상 1924년), 허근보(許廑父)의 <중국여해도(中國女海盜)> (1925년), 고명도(顧明道)의 <협골은구기(俠骨恩仇記) (1927년), <괴협(怪俠)> (1928년), <황강여협(荒江女俠)> (1929년), 장순구(張恂九)의 <강호의도전(江湖義盜傳)> (1930년), 병구(病癯)의 <쌍룡검(雙龍劍)> (1931년) 등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923년에서 1931년 사이의 이 제1차 무협소설 창작 절정은 주로 상해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총괄적으로 말하면 평범한 자가 많았고 고수는 비교적 적었다. “남상북조”가 한 기간을 웅패(雄覇)한 외에 그 가운데 영향이 비교적 큰 사람은 고명도, 요민애, 조초광, 문공직 등 3~4인에 불과하였으며 이 밖에는 대부분 한꺼번에 일시에 나타났지만 성세(聲勢)의 기세만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 북쪽은 조환정을 제외하면 고요하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1932년이 되어 환주루주(이수민)가 천진(天津) 천풍보(天風報)에 <촉산검협전>을 발표하자 순식간에 그 명성이 평강불초생을 능가해 버렸고, 이를 좇아 백우(宮竹心), 정증인, 왕도려, 주정목, 서춘우(徐春羽)가 북방에서 잇따라 일어나 민국 무협소설에 더욱 큰 제2차 절정을 열어 중국무협소설 예술을 새로운 고봉(高峰)으로 밀어 올렸고 무협소설 창작의 중심은 이에 북중국으로 옮겨졌다.
 
총체적으로 “구파무협소설” 발전의 역정(歷程)을 보면, 제1차 무협 붐 가운데 대표 주자인 상, 조 두 사람은 아직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장점을 완전히 펼쳐냈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들 두 사람은 무협소설관이 같지 않은데 기인하여 그 작품의 취향이 아주 다르기는 했어도 일정 정도에서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버리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쓴 점이 있다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상개연은 무술에 정통하였으면서도 무술의 묘사에 만족하지 못하여 기이하고 환상적인 전설(傳說)을 추구하였고, 조환정은 무술을 할 줄 모르면서도 한사코 무술을 묘사하여 전설을 꾸밈없고 믿을만하게 쓰려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조인데 다만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상씨 저작(向著)의 기이하고 환상적인 점(奇幻), 조씨 저작(趙著)의 호방하고 장쾌한 점(豪壯), 또 여기에 더하여 애정소설(言情小說)을 쓰다 무협으로 바꾼 고명도의 섬세하고 정교한 문필(文筆)은 구파무협소설 3대 유형의 초기형식을 구성하였고 기본적으로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구조를 다져 중국무협소설 대번영의 서막을 열어 젖혔다.
 
다만, 상개연은 전설을 이어 붙여 작품을 이루었고, 비검법술(飛劍法術)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실제상으로는 완정(完整)한 구상이 결핍되어 이로 인해 통일된 신괴무협소설(神怪武俠小說)의 풍격(風格)을 미처 형성하지 못하였다. 조환정은 제재(題材)를 일화(逸話)에서 취하여 힘써 사실감을 구하였지만 그는 무술을 할 줄 몰라서 마음은 여력이 있어도 힘이 부족하여 마찬가지로 완전한 기격무협소설(技擊武俠小說)의 풍격을 형성할 수 없었다. 고명도는 애정소설의 필법으로 <황강여협>을 썼기 때문에 연지와 분의 분위기가 진하여 보통 우물쭈물하는 부자연스러운 어투를 띠고 있고 또한 스토리의 곡절과 스릴에 연연하여 영웅남녀(英雄兒女)의 심리적, 사회적 제(諸) 방면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깊이 탐색하여 충분히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애써 추구하였다는데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얕은 이해에 흘러 더욱 더 완전한 아녀협정소설의 풍격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풍격 변천의 완전한 형태는 모두 “북파 4대가”의 손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민국 초기부터 20년대 말까지 평서예인(評書藝人, 민간 문예의 한 가지로 장편의 이야기를 쥘부채·손수건·딱따기 등의 도구를 사용해 가며 講說하는 사람)의 창작은 북방 무협소설계에서 여전히 성세(聲勢)가 아주 큰 일파였고, 그 영향은 족히 조환정과 한 번 장단(長短)을 겨룰만하였다. 이 일파의 대표인물은 왕치구(王致久)의 양대(兩代) 제자였다. 왕치구는 청말민초의 평서예인으로, <영경승평(永慶升平)> 강술로 유명하였고 그의 문하에 있던 몇 명의 제자는 “걸(杰)”자로 돌림자를 썼는데, 그중 장걸흠(張杰鑫)이 지은 <삼협검(三俠劍)>, 상걸묘(常杰淼)가 지은 <옹정검협도(雍正劍俠圖)>는 모두 한 시대에 유행하였다. 다만 문학의 표준으로 평가하자면 이러한 작품은 실로 우수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 후 상걸묘의 제자 장진정(蔣軫庭)이 이어 쓴 <금도회칠의(金刀會七義)> 등은 갈수록 질이 더 낮아져 다시는 독자에게 중시받지 못하였다. 총괄적으로 30년대 이전 북방에서 조환정을 제외하고는 무협소설의 창작은 여전히 저속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