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로 북방에서는 주정목이 나타나 남파 고명도의 풍격을 참신한 수준으로 발전시켰는데 명망이 있으면서 살아남은 매우 드문 일로서 남파의 풍격을 다시 뛰어나게 빛나도록 하였다. 당시 독자의 마음속에서 주정목의 지위는 북파 4대가만 못했는데 그 주요원인에는 두 측면이 있다. 첫째, 그에게는 <촉산검협전>, <십이금전표>, <응조왕>, <학철 5부작> 같이 충분히 특색을 발휘할 수 있고 자신의 풍격을 모아 대성(大成)한 장편대작이 없었기 때문에 독자의 특별한 주의를 끌 수 없었고 만약 4대가에게 단지 <만황협은>, <투권>, <무림협종>, <낙양호객(洛陽豪客)> 류의 일반 장편작품만 있었다면 그들이 독자에게 특별히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인지 여부도 대성(大成) 문제이다. 둘째, 주 씨의 작품은 전편에 흐르는 기세에서 4대가에 비해 조금 뒤떨어지는데 작고 정교함(小巧) 혹은 청아하고 수려함(淸麗)에 가깝고 웅혼함과 깊음이 조금 적어 어떤 때는 어느 정도 소심함을 드러내고 약간은 으스대는 느낌을 지니고 있다. 이는 그의 소양, 재능과 기백이 얼마간 부족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약 17부이고 그중 <칠살비(七殺碑)>가 가장 유명한데 이 작품은 1949년 봄에 출판되었고 아마도 그의 작품 중 압권(壓卷)일 것이다. 60~70년대 이래 주정목은 대만, 홍콩 연구자에게 중요시 되었는데 그 원인은 바로 섭홍생이 “주 씨가 일찍이 처음으로 백화(白話) 장회(章回)소설(몇 개의 회로 나누어 이야기를 서술한 장편소설)을 시작하였고 그 소설의 필법, 내용이 50년대 홍콩, 대만의 무협작가들에게 많이 모방되었으며 그 때문에 ‘신파무협소설의 시조’라는 평판이 있었다”고 말한 바와 같다. 구파무협소설의 흐름이 가라앉은 후 10여년 만에 주 씨가 대만과 홍콩 지기(知己)의 애정 어린 시선을 받게 되었는 바, 천리 떨어진 곳에 지음(知音)이 존재하였으니 불행 중 크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춘우는 주정목에 비하면 더욱 불행하였는데 40년 이래 줄곧 푸대접을 받았고 점차 세상에서 잊히게 되었다. 그렇지만 30~40년에는 그도 무단(武壇)에서 지위를 다투던 명작가였다. 서 씨도 자기의 분명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작품은 “설서(說書)” 느낌이 매우 짙었고, 늘 소설을 시작하면서 설서인의 말투로 첫 등장인물이 일단(一段)의 첫 대사를 말하고 또한 표(表), 백(白), 평(評)을 운영하여 하나로 융합한 창작기교로 희극적인 장면을 그려내는데 매우 뛰어났다. 그의 소설은 이야기의 스토리가 일반적으로 복잡한 편은 아니었지만 변화가 많고 표현을 완곡하게 쓸 수 있어서 독자의 흥미를 끌만 하였고 더욱이 그의 작품에는 특히 민간에서 예부터 전해오는 이야기의 정취가 있어 사람의 마음을 끌리게 하였다. 서 씨의 작품은 대략 12종이 있는데 그중 <벽혈원앙(碧血鴛鴦)>이 비교적 유명하다.
구파무협소설은 30여년간 성행하여 쇠하지 않았고 대개 신문·잡지에 연재되어 그 작자 및 작품의 수량을 정확하게 통계 내기는 어렵지만 책으로 인쇄된 것은 8백여 종, 작가는 2백여 명이었다. 40년대 후기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망소루주(望所樓主) 등 상당한 재능을 갖춘 약간의 신예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역사적인 원인으로 인해 그들은 새로운 한 세대의 대가(大家)로 미처 성장하지 못하였고 구파무협소설 예술의 고봉(高峰)은 북파 4대가의 손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나는 북파 4대가의 성취를 말하지만, 결코 그들의 작품이 완전하여 결함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상, 그들의 작품은 매 편이 모두 좋다고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장 좋은 작품 중에도 매장(每章), 매절(每節)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이는 창작기교의 문제는 전혀 아니며 이러한 상황을 초래한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먼저 사상(思想) 측면에서 보면 결코 진정으로 무협소설의 예술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다. 청말(淸末)부터 민국 초기 이래 서방의 문예이론이 물밀듯이 중국으로 들어와 아주 많은 사람들을 서방문예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도록 만든 동시에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다. 전통회화(繪畵), 한방의학을 부정하는 언론이 수십년 동안 유행하여 약해지지 않았고 소설 방면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이었다. 이는 당시에 이미 매우 유행한 관념이 되어 강대한 사회 여론적 압력을 형성하였고, 무협소설은 더욱 더 뭇 사람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북파 4대가는 사상적으로도 이러한 사조(思潮)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 때문에 그들의 무협소설 창작은 대부분 생활의 압박에 의한 것이었지 내심으로는 결코 이러한 종류의 일에 종사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백우는 평생 무협소설을 썼던 것을 자신의 치욕으로 생각했고, 환주루주는 심지어 이전에 신문에 게재한 저작을 공개적으로 검토하고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였다. 정증인은 스스로 “내가 쓴 이것은 문예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하였고 왕도려도 “고상한 지위에 오르기 어렵다”고 자인하였다. 이러한 사상 상태는 그들 작품의 예술적 품질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의 작품은 대부분 먼저 신문·잡지에 연재되었는데 종종 신문·잡지의 판매 상황에 따라 요구를 받으면 대충 결말을 짓거나 혹은 길게 늘이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계획할 수 없었고 이는 쉽게 구성이 산만하거나 혹은 용두사미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또한 북파 4대가의 당시 생활형편이 모두 좋지 못해 종종 동시에 몇 부의 연재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바빠서 숨돌릴 사이도 없을 정도였다. 하루 만에 매 작품별로 각각 1천자 가까이 써야 했고 이리하여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그럭저럭 버티는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다. 예를 들면 환주루주의 <만황협은>은 시작 부분 2집(集)까지는 아주 잘 썼으나 3집 이하는 명백하게 <야수폭언(野叟曝言)>을 그대로 베껴 그럭저럭 문장을 만들었고, 백우의 약간의 작품은 심지어 근본적으로 그의 자필(自筆)이 아니기도 하였다. 백우가 후에는 무협소설 쓰기를 매우 싫어하자 출판상이 다른 사람의 원고를 가지고 와서 그가 서명(署名)해 발표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그는 늘 집안사람의 간청에 따라 생계를 잇기 위하여 황급히 한 번 들춰본 후 본심에는 맞지 않지만 자기의 명의로 출판하는데 동의하였던 것이다. <용설검(龍舌劍)>, <경홍기(驚鴻記)> 등이 바로 그러한 경우였다.
정증인은 한창 쓰고 있는 소설을 간단한 표로 늘어 놓고 벽에 부착한 후 출판담당자가 찾아와 원고를 재촉하면 그는 담당자를 앉아서 기다리도록 하고는 표에서 어디까지 썼는지 좀 보고는 황급히 붓을 들어 한 단락을 이어 쓴 후 이를 알렸다. 그들이 바로 이러한 정신과 생활의 이중 압박 하에서 창작을 하면서도 적지 않은 명작을 써냈는데 이는 실로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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