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名著大觀) 서문 1

무협 일반 2016. 9. 28. 19:30 Posted by 비천호리

주청림(周淸霖)

 

1915년 12월 임서(林紓, 琴南)의 문언문 단편 “부미사(傅眉史)”가 처음으로 무협소설이라는 전용명칭으로 포천소(包天笑)가 책임편집한 상해 “소설대관(小說大觀)” (季刊) 제3집에 발표된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80주년이 되었다. 이 80년 가운데 북경(京), 천진(津), 상해(滬), 광동(粵), 대만(臺), 홍콩(港) 등의 근 600에 달하는 작가들의 부지런한 창작을 통해 발표, 출판된 무협소설이 이미 약 4천 종이고 단행본 누계 인쇄부수는 수억 부에 달하였다. 게다가 각색된 그림책과 영화, TV 작품은 참으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만큼 많았다. 그 기간에 명가의 뛰어난 작품이 차례로 출현하여 몇 세대의 독자들은 홀린 듯 취한 듯하였고, 중국무협문학 사상 일대 기관(奇觀)을 이루었다.
 
무협소설의 열독(閱讀) 붐에 비하면 그 연구는 상대적으로 한산하였다. 나는 80년 이래 무협소설 연구는 대체로 4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1) 1951년 6월 이전이 1단계이다. 30~40년대에 좌익작가 구추백(瞿秋白), 심안빙(沈雁氷), 정진탁(鄭振鐸) 등이 근 10편의 저술을 발표하여 전면적으로 무협소설을 부정하고 “반동”적인 “봉건적 소시민 문예”로 배척하였다. 그들은 주로 사회학의 각도에서 이러한 논단(論斷)을 하였고 비록 이해되는 면이 있다고 해도 그러나 아주 큰 단편성이 있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심안빙, 정진탁이 문화계를 이끄는 지위(중앙문화부 부장, 부부장 각 담임)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1951년 6월의 무협소설 출판 전면금지를 초래하였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구, 심, 정씨의 논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는 응당 무협소설이라는 이 문학종류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관건 가운데 하나이어야 하지만 무협소설 연구자는 이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여전히 한 편의 무게 있는 저작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고 이것은 무협소설 연구 가운데 하나의 중대한 결함이다.
 
이 단계 중에 서국정(徐國楨)은 1949년 상해 “우주(宇宙)” 잡지의 복간호 제3, 4, 5호에 “환주루주 및 그 작품의 연구”(1949년 3월 단행본 출판시 “환주루주론”으로 바꿈)를 발표하여 무협소설 명가 환주루주(이수민)의 생애와 인생철학에 대하여, 그 작품의 내용, 형식과 예술특징 등에 대하여 유익한 탐색을 하였다. 이는 무협소설 역사상 단 한 사람의 작가를 연구한 첫 번째 전문적인 저작이었고, 그 가운데 약간의 중요 논점은 지금도 여전히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도 사람들의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2) 50~70년대는 2단계이다. 이 기간에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연구성과는 1962년 10월에 위소창(魏紹昌), 오승혜(吳承惠)가 책임편집한 “원앙호접파연구자료”가 상해에서 출판된 것이다. 비록 이 저술이 무협소설에 대하여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는 있고 또한 무협소설을 원앙호접파에 포함시키는 것도 매우 타당하지 못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은 처음으로 대단히 많은 구파무협소설 목록을 수집하였고, 부분적인 무협소설가의 생애자료와 구, 심, 정씨 등 무협소설을 평론한 다수의 저작을 수록하여 무협소설 연구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 공로는 실로 매몰되어서는 아니 된다.
 
1967년, 중국 혈통의 미국 저명학자 유약우(劉若愚)가 시카고에서 영문판 “중국의 협(中國之俠, The Chinese Knight-errant)"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첫 번째로 중국역사와 문학 중의 협(俠)의 전통을 종합연구한 전문저술이었고 체계적인 중국의 협문화(俠文化) 연구를 창시한 공로가 있다.
 
70년대, 중국대만학자 양연승(楊聯升), 당문표(唐文標), 진효림(陳曉林) 등은 10여 편의 전문저술을 발표하여 무협소설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3) 80년대~1993년은 3단계이다. 중국대륙의 개혁개방과 해협 양안의 문화교류가 날로 빈번해지는 큰 형세 하에서 신구무협소설의 대량출판 혹은 재판(再版)에 따라 무협소설 연구는 최초의 붐을 일으켰다. 인민일보, 문회보(文匯報), 문예보, 문학보, 상해문론(上海文論), 문예쟁명(文藝爭鳴), 서림(書林) 등 10여 곳의 전국적 영향력이 있는 신문, 잡지들이 잇달아 무협소설을 연구한 전문저술과 학술저작을 발표하였고, 장공생(張贛生), 나립군(羅立群), 유음백(劉蔭栢), 조정문(曺正文), 진평원(陳平原), 진묵(陳墨), 채상(蔡翔) 등은 무협소설통사, 단대사(斷代史), 총론, 작가론, 작품론 등 각 방면에서 전문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게다가 3부의 무협소설사전(寧宗一, 胡文彬, 劉新風이 각각 책임편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사년(徐斯年), 풍기용(馮其庸), 풍기재(馮驥才), 장배항(章培恒)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발표한 단편논문도 이미 백편을 넘어섰다. 북악문예출판사는 무협명가 백우(白羽, 宮竹心)의 전집을 출판하였는데, 그 “출판설명”에서 백우 작품의 판본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고증을 하였다. 이 출판사는 곧바로 “환주루주소설전집”을 내놓았는데 저명한 학자 금개성(金開誠)이 서문을 썼고 책 말미에는 “환주루주작품연표”와 관련된 평론을 붙였다.
 
중국대만, 홍콩의 연구자들도 중대한 공헌을 해냈다. 섭홍생은 대만연경출판공사(臺灣聯經出版公司)를 위하여 “근대중국무협소설 명저대계”를 책임편집, 비평교감한 후, 또 강소문예출판사를 위하여 “대만 9대 무협명가 대표작”을 선택편집하였고, 게다가 장편의 서문과 독서안내 글을 썼으며 단기에 또 그의 20여년 래의 평론저술을 모아 “무협소설담예록(武俠小說談藝錄)"을 출판하였다. 호정군(胡正群)은 즉 상해의 학림출판사와 강소문예출판사를 위하여 ”대만신파무협소설명작대전(臺灣新派武俠小說精品大展)"을 책임편집하였고, 또 장편의 서문, 독서안내 글을 썼으며, 게다가 뽑힌 작가의 작품출판연표를 붙였다. 심등은(沈登恩)은 오로지 김용소설 연구를 위하여 “김학연구총서(金學硏究叢書)"를 편찬하였는데 이미 20여종을 출판하였다.
더욱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는 것은 홍콩중문대학이 1987년 12월에 “국제중국무협소설연구토론회(國際中國武俠小說硏討會)”를 개최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무협소설 연구가 이미 학술전당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1992년 5월 대만담강대학(臺灣談江大學)이 또 “협과 중국문화연구토론회(俠與中國文化硏討會)"를 거행하고 또한 ”협과 중국문화“ 논문집을 출판하여 무협소설 연구로 하여금 문화연구의 영역에 진입하도록 하여 하나의 새로운 경지에 오르게 하였다.
 
(4) 1994년부터 4단계에 진입하였다. 1994년 1월 28일 중국무협문학학회가 북경에서 성립을 선포하고 전국 각지에서 온 46명의 연구자로 구성된 제1차 이사회를 개최하여 남개대학 영종일 교수가 회장을 맡고 김용, 풍기용을 명예회장으로 임명하였다. 학회의 성립은 중국의 무협소설 연구가 분산된 무조직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된, 조직이 있고 지도자가 있는 중요한 단계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995년 3월 중국무협문학학회는 북경에서 “중화무협소설창작대상(中華武俠小說創作大獎)” 심사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여 1990년 이후에 창작된 60여부의 신무협소설 가운데 은검상(銀劍獎)과 동검상(銅劍獎) 각 3명(溫瑞安의 溫柔一刀, 于棟樓의 短刀行, 周郞의 鴛鴦血, 獨孤殘紅의 銷魂一指令, 滄浪客의 一劍平江湖, 巍琦의 金帖俠盜)을 선정하였고, 금검상(金劍獎) 2명은 곧 평생 성취상으로 하여 중국무협소설 창작에 대하여 탁월한 공헌을 한 김용, 양우생에게 수여하였다.
 
9월 하순에는 ‘95 북경무협문학 학술연구토론회가 성대하게 열렸는데 그 토론회는 홍콩, 대만에서 두 차례 열린 연구토론회를 잇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1차 전국 규모(대만, 홍콩지구 포함)의 학술성회(學術盛會)이기도 하였으며 근년래 무협소설 창작과 이론구축을 살펴보는 큰 모임이었다. 회의에서는 엄숙하게 “무협소설은 우리나라 문학영역의 유달리 선명하고 아름다운 한 송이 진기한 꽃이다. 2천년 민족정신과 역사의 혹독한 시련의 침윤(浸潤)을 통해 더욱이 80여년 동안 몇 대의 무협소설 작가들이 쏟아 부은 심혈에 힘입어 무협소설은 예속적인 것에서 점차 발전하여 큰 조류가 되었고, 찬란한 중화문화를 대표하는 한 종류가 되었다. 우수한 무협소설은 한결같이 애국과 정의의 기치를 표명해 왔고 개성이 선명한 이미지로 민족의 미덕, 권선징악, 激濁揚清(탁한 물을 흘려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이다)을 밝힘으로써 무릇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무협이 있고, 환주광(環珠狂), 김용광(金庸狂)이 있으며 무협 가작(佳作)은 전 중화민족 공동의 정신적인 재산이고 공유되는 심미적 기쁨과 유쾌함이다.”고 지적해냈다.
 
24일에는 회의폐막식 및 제1기 “중화무협소설창작대상” 시상식을 인민대회당에서 융성하게 거행하였고 중앙TV방송국과 각 주요 신문이 모두 보도하였다.

신수판(新修版) 의천도룡기 고친 내용 15

金庸 2016. 9. 27. 16:27 Posted by 비천호리

217. 평생 아내로 맞이하지 못한다?

제44회, 신수판의 조민은 맹세를 했기 때문에 중원을 떠나려고 하고, 장무기는 그녀와 함께 몽고국으로 이민하여 정착하려고 한다. 길 떠나기 전날 밤 조민이 당초 장무기에게 승낙하게 하였던 세 가지 일 중 세 번째 것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바로 그녀의 눈썹을 그리는 것을 돕는 것으로 구판과 같다. 뜻밖에도 주지약이 갑자기 나타나 구판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그녀에게 속한 한 가지 일을 거론하는데 그것은 장무기가 조민과 같이 살면서 자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결혼은 허락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이건.... 정말 난감하구나!

 

218. 후기(後記)

신수판에는 모두 새로운 후기가 있는데 의천도룡기의 새 후기는 매우 새롭게 느껴지는데 김용은 의천도룡기의 가장 큰 변동은 장무기가 최종적으로 자기의 짝을 확실히 정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마지막에 그와 조민이 몽고로 거주지를 옮긴다고는 하지만 세상일은 변하기 쉬워 주지약이 몽고로 그를 찾아갈지 안 찾아갈지 누가 알겠는가? 그는 명교 때문에 홀로 중원으로 돌아가 일을 처리할까? 그와 조민은 페르시아에 가서 소소를 찾을까? 그는 서역(왜 서역이지?)에서 은리와 만나게 될까? 등등.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게 어디 큰 변동으로 볼 수 있을까라고 생각한다. 구판 중의 장무기도 자기의 짝을 확실히 정하지 않았었다!

 

신수판에서 주지약이 최후에 제기한 그 일은 장무기가 조민과 같이 살며 자식을 낳아도 되지만 조민을 아내로 맞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장무기는 이때 별거 아닌 것으로 느끼고 결혼 여부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며 기뻐하는데 아무런 영향이 없다고 생각하여 승낙을 하였다. 나는 이런 생각이 매우 개방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심지어는 절대 다수의 현대인조차도 그렇게 못할 것인데 장무기의 이 점은 매우 탄복스럽다. 그렇지만 이 일은 내가 있는 이곳에서는 “협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비록 조민은 마땅히 혼례가 없는 것에 대해 개의치 않아야겠지만 그러나 장무기는 그녀를 위해 이런 결정을 해서는 안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의()”에 위배되는 것이다. 하물며 조민은 장무기를 위해 그렇게나 많은 일들을 했는데 장무기는 도리어 “그 해줄 수 있는” 혼인조차도 조민에게 해주지 않았다. 이것은 정말로 조민을 사랑한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리하여 나는 주지약의 이러한 요구는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하며 장무기는 마땅히 승낙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주지약은 다만 그대들이 결혼하지 않기만 하면 팔년 십년이 지나더라도 당신 마음 속에서는 나를 생각할 것이고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용은 이러한 종류의 감정은 어린 남자애, 어린 여자애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13~4살 되는 어린 여자애들이 소설을 쓴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난감하다, 이를테면 나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아주 많은 여자 친구들이 없었던 것이 원인일까? 7년 법칙대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애정이 식는 것일까?

 

219. 총결(總結)

의천도룡기의 변동도 적지 않은데 구판 의천도룡기에 실수와 누락이 비교적 많았던 것이 원인이고 비교적 큰 변동은 통상 모두 역사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1) Time line의 변경으로 논리와 상황에 맞추었다.

2) 구성을 모두 부드럽고 완곡하게 고쳤고 인물도 모두 좋은 쪽으로 고쳤다. 모든 사람들에게 나쁜 일을 줄였고 좋은 사람에게는 나쁜 일을 더욱 줄였다. 줄일 수 없는 것은 나쁜 사람에게 전가하였다. 예컨대 삼도(三渡, 소림사 항렬 세 고승)가 결코 하태충 부부를 죽이지 않았고, 장삼봉이 송청서를 죽이지 않은 것 등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개방, 우리 용아(蓉兒)의 개방은 여전히 득세하지 못하고 전과 다름없이 별 볼일 없고, 그렇게 줄어 들었다.

3) 양 저저(양 누나)와 주지약은 유일하게 2)번의 변경과 어긋나는 두 사람이다. 양 저저는 위협하여 자백을 강요하고 주지약은 마음이 독하고 행동이 악랄하다.

4) 소소와 장무기의 감정이 더 좋다. 그러나 장무기는 뜻밖에도 그녀를 “어린 여동생(小妹子)”으로 부르는데 썸타는 건가?

5) 명교와 휘하의 봉기군의 관계가 구판에 비해 분명하다. 그것은 명교는 봉기군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수판은 적지 않은 단락을 추가하여 봉기군의 전황을 묘사한다.

6) 장무기와 조민의 감정이 더 좋다.

7) 독자적으로 처음 구양진경의 내력을 드러냈다.

8) 장무기가 총명하게 변했다.

9) 명교에 대한 묘사가 상세해졌다.

 

출처 : http://blog.sina.com.cn/s/blog_4ab03d560100u0vz.html

신수판(新修版) 의천도룡기 고친 내용 14

金庸 2016. 9. 26. 20:28 Posted by 비천호리

202. 성곤의 무공

제39회, 사손이 끝내 성곤을 찾아내고 두 사람이 싸움을 벌인다. 구판에서는 장무기가 성곤의 무공이 거의 소림사 도()자 항렬 세 승려에게 지지 않을 것으로 보았지만 신수판은 단지 성곤의 무공이 사손의 위라고만 고쳤다.

 

203. 안령비천도(雁翎飛天刀)

제39회, 사손이 큰 원수를 갚고 스스로 무공을 폐하여 천하의 군웅에게 인과응보를 셈한다. 첫 번째로 나선 사람은 안령비천도 구 노영웅의 아들이다. 구판에서는 그 스스로 자기는 안령비천도 구 노영웅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이치대로 말하면 스스로 자기 아버지를 노영웅이라 부르니 이것은 너무 겸허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신수판은 이를 고쳐서 단지 자기는 안령비천도의 아들이라고만 칭하고, 사손이 영존 구 노영웅은 내가 죽인 것이라고 말한다. 그밖에 한 구절을 더하여 당초 그와 구 노영웅이 손을 쓸 때 일대 일로 광명정대하였고 누구도 정당치 않게 유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204. 주전

제39회, 신수판에서는 주전에 관한 단락을 추가하였다. 장무기(이때 비로소 생각이 나서)가 조금 전 그의 얼굴에 입은 도상(刀傷)을 치료하는데, 그것은 장무기와 소림사 도()자 항렬 세 고승(三渡)과 격투를 벌일 때 주전이 삼도의 마음을 분산시키기 위해 스스로 그은 것이다. 주전은 범요가 스스로 몸을 상하게 한데 탄복하여 자기도 한 번 흉내내 봤다고 말한다.

 

205. 기름

제39회, 성곤의 패거리가 소림사를 불태우자 명교 홍수기가 끈다. 공지(空智)가 공문() 사형의 행방을 묻자 구판의 성곤이 공문의 몸에 쇠기름, 돼지기름이 잔뜩 끼얹어졌다고 말하지만 신수판은 석유와 채유(菜油)로 고쳤다. 하하, 생각해보니 소림사에서는 쇠기름, 돼지기름을 찾아낼 수 없었구나~.

 

206. 이천원(李天垣)

제39회, 신수판의 장무기는 이천원과 팽형옥을 보내 천응기 뭇 교도를 이끌고 그 이름 없는 작은 섬에 가서 의천검과 도룡도를 찾아 오도록 한다.

 

207. 장송계의 언어능력

제39회, 장송계가 무당산 아래에서 2만 몽고 철기가 소림사를 공격하러 온다는 소식을 듣는다. 구판에서 그는 자기가 몽고어를 안다고 말하고, 게다가 김용은 그가 각지의 방언에 뛰어나다고 말하는데 보아하니 언어의 기재(奇才)인 것 같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신수판에서는 삭제해 버렸다.

덧붙임 : 신수판 중의 이천원과 팽형옥은 임무가 있는데도 단신으로 하산한다. 생각건대 원군(元軍)이 도착했을 때는 포위를 뚫고 갔나 보다.

 

208. 진상(眞相)

제39회, 구판 중의 장무기는 사손이 감금된 지하 감옥의 벽에 그린 의천검과 도룡도 도난사건의 경과를 보았다. 구판의 사손은 기실 진상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지약이 도와 검을 훔쳐갔고 조민을 바다에 던졌다는 것을 알면서 매우 사리에 어긋나게 그는 여전히 장무기가 주지약에게 장가들도록 한다. 신수판은 이 단락을 삭제하였다.

 

209. 현명이로의 말로

제39회, 현명이로가 나타나 주지약이 얻은 무공비적을 빼앗으려고 한다. 구판 중의 장무기는 건곤대나이를 쓰고 거기에 더하여 조민이 옆에서 이간질을 하여 결국 현명이로가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끝내는 반목하여 원수가 되어 서로 격투를 벌인다. 이것이 그들의 결말인데 여전히 일류고수이다. 신수판은 장무기가 그들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는 틈을 타서 두 사람을 제압하고 구양신공으로 7~8할의 음한한 내력을 없애버려 두 사람은 이후에 현명신장을 수련할 수 없게 되고 삼류의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아 신전팔웅에도 미치지 못하게 된다.

 

210. 물증

제39회, 신수판의 장무기는 현명이로를 다룬 후에 약간의 문장을 추가하였는데 장무기와 조민이 사랑을 속삭이면서 양저저가 주지약의 몸에서 얻어 떠나기 전에 장무기에게 넘겨 준 작은 보따리를 연다. 알고 보니 그 안에는 십향연근산이 든 작은 병과 그 현철 두 조각이 있었다.

 

211. 명나라와 명교

제39회, 장무기가 무목유서를 소림에 지원 나온 서달에게 선사한다. 신수판은 당시 주원장이 소림사에 와서 퇴위를 강요할 때 서달과 상우춘이 장무기와 사이가 좋은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심하여 두 사람을 따돌린다.

명교는 장무기의 정돈과 개선을 거쳐 마교에서 중원 군웅의 영수로 변하였고 끝내는 대업을 이루었다. 비록 그 후 주원장이 다른 마음을 가져 간계로 제위를 탈취하였지만 그가 강산을 얻는 것을 도운 사람들이 모두 명교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국호를 “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수판은 또 비록 주원장이 제위를 얻기는 했지만 명교 교주의 자리를 도모하는데는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명교의 명조 조정에 대한 영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주원장은 명교의 흔적을 없애는데 전력을 다하고 심지어는 적지 않은 명교 출신의 대장, 예를 들면 풍승(馮勝), 부우덕(傅友德), 남옥(藍玉) 같은 이는 전 가족이 죽임을 당한다. 상우춘은 그 이전에 일찍 죽었으나 서달은 주원장에게 독으로 죽임을 당하고 단지 탕화 한 사람만이 천수를 누린다. 그는 매우 평범하여 주원장의 명에 무조건 따랐기 때문이다.

주) 서달이 주원장에 의해 독사했다는 것은 단지 소문일 뿐이다.

 

212. 도()를 이어 붙이다.

제39회, 예금기 장기사 오경초와 열화기 장기사 신연이 힘을 합쳐 도룡도를 이어붙이는 이야기는 구판에서는 원군()이 소림사를 공격하기 전이지만, 신수판에서는 장무기가 군웅을 이끌고 원군을 격퇴하고도 10여 일이 지나서 이천원과 팽형옥이 작은 섬에서 부러진 도와 부러진 검을 찾아온 후이다.

 

213. 한림아의 죽음

제40회, 팽형옥이 중요한 군사정보를 보고하는데 구판에서는 한산동의 전사인데 신수판은 이미 황제를 칭한 동로 홍건군 수령 한림아가 주원장이 보낸 사람에게 익사 당하였고, 주원장은 상우춘 수하의 장령인 요영충(廖永忠)을 희생양으로 삼아 사형에 처하는 소식으로 고쳤다. 장무기가 양소, 범요, 위일소, 오산인, 오행기 장기사를 소집하여 회의를 연다. 최후에 얻어낸 결론은 뜻밖에도 명교가 주원장과의 관계를 끊는 것이다. 명교 총단은 주원장 등을 간섭하지 않고 주원장은 천하를 공략할 수 있으되 다만 명교 교주의 지위는 쟁탈할 수 없고, 그들이 명교를 지휘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주) 이것은 Time line의 변동인데 명교 총단과 봉기군의 관계가 약간 기괴하다.

 

214. 송청서의 죽음

제40회, 장무기 등의 사람들이 무당산으로 돌아간다. 구판에서는 장삼봉이 직접 송청서를 죽이지만 신수판은 송청서가 돌연 “아버지”라고 소리치면서 들것에서 뛰어내리려고 몸부림치고 장삼봉과 송원교에게 엎드려 절을 하다가 지나치게 힘을 써서 머리뼈의 상처가 터져서 죽게 된다.

 

215. 명왕(明王)

제40회, 장무기와 조민이 주원장의 세력 범위인 수도 응천(應天, 지금의 南京)에 도달한다. 구판에서는 주원장이 간계를 써서 장무기를 억지로 내쫒고, 장무기는 편지를 남겨 양소에게 지위를 넘기고 자기는 물러난다. 신수판은 변동이 매우 커서 양소, 범요 등 수뇌인물이 모두 응천에 집결하여 장무기를 명왕(明王)으로 옹립하려고 하지만 장무기는 명교의 3대령, 5소령 때문에 한사코 응낙하지 않는다.

 

216. 페르시아 사절단

제40회, 페르시아 명교에서 사절단을 응천에 파견하는데 대성보수왕(大聖寶樹王), 지혜보수왕(智慧寶樹王), 상승보수왕(常勝寶樹王)이 페르시아 명교 총교인 소소 교주의 명을 받들어 12개 성화령 중 나머지 6개를 보내 온다. 여기에 이르러 장무기는 비로소 성화령을 전부 모으게 된다. 소소는 게다가 장무기에게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장무기는 건곤대나이 양피지를 사절단에게 넘겨 페르시아 소소에게 가져다 주도록 하고 또한 요점만 추려 약간의 건곤대나이와 성화령 무공을 세 사람에게 가르친다.

덧붙임 : 이때에야 비로소 3대령 5소령이 완전히 기술된다.

신수판(新修版) 의천도룡기 고친 내용 13

金庸 2016. 9. 26. 11:34 Posted by 비천호리

196. 주지약의 장편(長鞭)

제38회, 주지약이 장편으로 무당이협을 대적한다. 신수판에서는 이 장편에 설명을 추가하여 길이가 5장에 가깝고(매초풍의 채찍보다 더 길다), 채찍 끝에는 가시 갈고리가 가득 퍼져 있다.

 

197. 주지약의 유연주에 대한 호칭

제38회, 주지약 대 유연주. 구판에서 주지약은 생각은 “나는 오늘 유이숙(俞二叔)의 손에 죽는다”였으나, 신수판은 “유이협(俞二俠)”으로 고쳤다.

 

198. 다른 건 감히 말할 수 없다.

제38회, 장무기가 깊은 밤에 아미파를 방문하여 송청서의 치료를 돕겠다고 말하고 한 목숨으로 한 목숨을 바꾸어 주지약이 사손을 해치지 않기를 바란다. 신수판에서 주지약이 한마디를 묻는다. “단지 이것뿐이고 다른 건 없나요?”장무기가 더듬거리며 말한다. “다른 건 감히 말할 수 없소이다....” 아이쿠!!!

 

199.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

제38회, 장무기가 송청서를 치료하려고 한다. 구판에서는 그가 유연주가 십성의 공력을 썼기 때문에 송청서 자신의 내공 기초가 약했더라면 이미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을 거라는 것을 알아낸다. 신수판에서의 그는 유연주가 송원교를 생각하여 관대한 조치를 취해 그 자리에서 송청서의 목숨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았던 것을 발견한다.

신수판의 장무기는 뜻밖에도 한 가지 생각을 한다.

“내가 만약 그를 구하지 못하여 죽게 되면 누구도 나를 탓하지 못할 것이다. 지약이 과부가 되면 다시 나와 옛 인연을 이어갈 수 있을까?

그러나 그는 결국에는 의사로서 부모가 아픈 아이를 염려하듯 하듯 하는 마음에다 박애심을 가진 사람으로서 끝내는 전심전력으로 송청서를 치료한다.

둘째날, 뭇 사람들이 소림사 뒷산으로 가려고 할 때 장무기는 주지약이 상복을 입지 않은 것을 보고 송청서가 죽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신수판에서는 추가로 “자기의 진짜 속마음으로 송청서가 죽기를 바라는지 살기를 바라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라는 한 마디를 더했다.

 

200. 백망편(白蟒鞭)

제38회, 양저자가 다시 나타났다. 구판에서 그녀는 “‘구음백골조’가 반드시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수판은 “‘구음백골조’와 ‘백망편(白蟒鞭)’이 반드시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공이 아닐 수도 있다”로 바꿨다.

참고 : 신수판 사조영웅전 중 매초풍의 편법(鞭法)에 “백망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주지약도 이 무공을 쓸 줄 알기 때문에 신수판은 이에 이름을 적어낸 것이다. 주지약은 갈수록 매초풍을 닮아가는 것 같다.

 

201. 주지약의 비밀

제38회, 양저저가 주지약을 제압하였다. 신수판에서는 상당히 많이 고쳤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1) 양저저가 주지약의 품에서 작은 보따리를 빼내고 또 구음백골조로 위협하여 주지약이 한 가지 비밀을 토로하게 하는데 그것은 의천검과 도룡도가 있는 곳이다. 그것들은 현재 은리가 “세상을 떠난” 그 섬에 있다. 구판에서는 주지약이 번거롭게도 몸에 지니고 있다가 무심결에 떨어 뜨려 발각된다.

 

2) 사손이 금강경을 염송한다. 주지약이 들으면서 만안사에서 있었던 옛일을 회상한다. 구판의 만안사에서 멸절사태가 주지약에게 말하는 비밀, 명령 등이 모두 이곳으로 옮겨졌다.

 

3) 멸절사태가 15세였을 때 그녀의 사부 풍릉사태는 이미 그녀를 다음 대 장문으로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4) 의천검과 도룡도의 내력을 수정하였다. 구판에서는 양과의 현철검을 녹이고 서방(西方)의 정금(精金)을 더하여 의천검과 도룡도를 주조하였었다. 신수판은 현철검에 서방의 정금을 더하여 도룡도를 주조하였고, 군자검과 숙녀검을 녹인 후 합쳐서 의천검을 만들었었다고 하고 게다가 군자검과 숙녀검은 “당시 가장 예리한 두 자루 보검”으로 불리웠다“고 고쳤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데 이로써 의천검에는 현철검의 혈통이 사라지게 되었다.

 

5) 구판에서는 멸절이 “곽정과 황용이 1개월 여 동안 심혈을 쏟아 병법과 무공의 정요(精要)를 썼다”고 말한 것을 신수판은 “곽정과 황용이 수 개월 동안 심혈을 쏟았다”로 고쳤다.

 

6) 병법 : 신수판은 “병법은 무목유서에 근거하고, 곽정이 젊은 시절 몽고군에서 경험한 몽고인의 야전용병술을 추가하였다”고 말한다.

 

7) 무학비적 : 구판에서는 무학비적이 한 부에 그치지 않는 듯 보이고 그 중 가장 귀중한 한 부는 구음진경과 한 부의 항룡십팔장장법정의(降龍十八掌掌法精義)이다.

신수판에서 무학비적은 한 부인 듯 고쳤는데 그 가운데 구음진경, 황약사의 모종의 절학, 홍칠공의 정묘한 무공을 포함한다. 그 중 구음진경 가운데의 속성무공은 이미 황약사가 방법을 강구하여 속성으로 익힐 수 있으면서도 후환은 제한되도록 바로 잡았다.

 

8) 구판에서 병법과 무공비적은 직접 도룡도와 의천검 속에 숨겨져 있는데, 도룡도에 숨겨진 것은 병법이고 의천검에 숨겨진 것은 무공비적이다. 많은 독자들은 도검 속에 얼마나 많은 공간이 있다고 이렇게 많은 문자를 넣을 수 있느냐고 지적하였고 어떤 사람은 주조할 때 어떻게 도검의 중간에 타기 쉬운 물건을 숨길 수 있느냐 등등을 말하였다. 이런 까닭에 신수판은 곽정과 황용이 병법과 무공비적을 매우 은밀한 모처에 숨기고 지도와 진입방법을 현철 두 조각에 새겨 도와 검 속에 숨겼다고 고쳤다.

 

9) 신수판에서 멸절은 심지어 곽부를 언급하여 곽정과 황용이 곽부의 성미가 거칠고 경솔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와 검을 그녀에게 주지 않고 곽양과 곽파로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10) 또한 매우 많은 독자들이 왜 곽정과 황용이 비밀을 직접 아들과 딸에게 알려주지 않고 빙빙 돌려 도검 속에 숨겨야만 하느냐는 의견을 제기한다. 김용은 멸절의 입을 빌려 “곽정과 황용 두 사람은 병법과 무공이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와, 몽고 오랑캐를 쫓아낼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는데 간사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후환이 무궁할 것을 우려하였다”고 설명한다(그래도 어느 정도는 억지스럽다).

 

11) 도검의 사용방법 : 구판에서 도와 검으로 서로 찍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지만 세심한 어떤 독자는 만약 자삼용왕 같은 사람이 진짜로 도룡도를 들고 의천검을 든 멸절을 찾아가 겨루게 되면 두 사람이 한 번 찍게 되면 도와 검이 모두 부러지고 비밀이 바로 굴러 나오게 되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제기한다.

신수판은 도룡도 칼자루(刀柄)에서 7촌 떨어진 칼등(刀背) 부분은 연철(軟鐵)이고, 의천검의 검자루(劍柄)에서 7촌 떨어진 검날로 서서히 잘라 들어가 완만하게 갈고 켜면 도검을 열 수 있다고 고쳤고, 또한 분명하게 7촌 부분은 싸울 때에는 부딪히지 않을 거라고 썼다.

주) 이렇게 고치고 나니 의천검이 도룡도에 미치지 못하고 단지 쌍방 7촌 부위에 대해서만 의천검이 비로소 도룡도를 자를 수 있는 듯하다.

추가 주) 윗 글은 빙화도에서 사손이 발견한 도룡도의 이빠진 곳은 도의 날(刀刃) 부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칼등(刀背)이어서 모순되는 것 같다.

 

12) 주지약도 외딴섬에서 죄를 범한 경과를 떠올린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조민의 품에서 십향연근산을 꺼낸다. 밥을 하겠다고 나서서 독을 쓴다. 검을 들고 장무기 옆에 서서 차마 손을 쓰지 못한다. 사손의 위풍늠름함에 겁먹어 감히 손을 쓰지 못한다. 장무기가 얼굴이 부어오른 아가씨에게 그렇게 친밀하게 대하는 것을 질투하여 그녀에게 열 몇 번의 칼을 긋는다. 은리와 조민을 바다에 던진다. 의천검과 도룡도를 잘 숨긴다. 자기에게 상처를 내 혐의를 벗어난다. 약간의 십향연근산을 복용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잠이 들어 해를 입은 것처럼 가장한다.

 

13) 보물이 숨겨진 곳 : 죄를 범한 후 다음날 반에 주지약이 현철 조각을 꺼낸다. 그 중 한 조각에는 “보도산 동쪽 도화도(普渡山東桃花島)”라고 쓰여 있고, 다른 한 조각에는 도화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원래 곽정과 황용이 보물을 도화도에 숨겨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주지약이 아무 말 없이 떠났는데 마지막에 절강의 정해(定海)에서 그녀를 찾게 된 까닭이다. 그녀는 아미파를 인솔하여 정해에 잠시 머무르게 하고 그 사이에 바다로 나가 보물을 찾았다.

주) 뒷 문장에 설명이 있는데 도룡도 가운데 숨겨진 것은 쇠로 된 조각이고, 의천검 속에 숨겨진 것은 “보도산 동쪽 도화도”라는 쇳조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