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1

무협 일반 2016. 10. 5. 08:39 Posted by 비천호리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 중에서
장공생(張贛生)
 
중국의 무협소설은 역사가 유구하지만 민국 건립 전에는 결코 “무협소설”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송(宋), 원(元) 양대에 <태평광기(太平廣記)>는 이러한 유형의 작품을 “호협류(豪俠類)"에 포함시켰고, <몽양록(夢梁錄)>과 <취옹담록(醉翁談錄)>은 “박도(朴刀)”, “간봉(杆棒)” 항목에 분류하였다. 명대에 이르러 단성식(段成式)이라는 이름으로 가탁(假托)하여 저술된 <검협전(劍俠傳)>, 다시 내려와 청 광서 초에 이르러 <삼협오의(三俠五義)>가 간행되고 달리 <충렬협의전(忠烈俠義傳)>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사람들은 드디어 같은 유형의 작품을 “협의소설”이라고 불렀다. 조금 후에는 또 “협정소설(俠情小說)”, "기협소설(奇俠小說)“, ”협용소설(俠勇小說)“, "의협소설(義俠小說)”, "임협소설(任俠小說)“ 등의 명칭이 있게 되어 호칭이 매우 혼란하였지만 유독 ”무협소설“이라는 명칭은 나타나지 않았다.
 
“무협(武俠)”이라는 한 단어는 최초로 <소설총화(小說叢話)> 가운데 정일(定一)의 "<수호(水滸)>를 논하다"(광서 30년, 1904년 간행)에 보이는데, 글 중에서 말하길 “무협의 모범을 남겨 사회로 하여금 그 혜택을 받도록 한 것은 실로 시내암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4년 후 (광서 34년, 1908년) 각아(覺我)는 <나의 소설관(余之小說觀)>에서 “일본 蕞爾三島가 그 국민은 모두 무협(武俠)으로 자임하고..... 이 <무협의 일본(武俠之日本)>은 19판(版)이고..... <무협함대(武俠艦隊)>..... 책이 발간되면 빨리 보려고 서로 앞을 다툰다.”고 말하였다. 게다가 번역된 <무협함대> 중에서도 여러 차례 “무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민국 4년(1915년)에 이르러 상해출판의 <금요일> 제38회(2월 20일 출간)에는 소초(小草)가 지은 <무협원앙(武俠鴛鴦)>이 실렸고, 9개월 후에는 <소설대관(小說大觀)> 제3집(12월 1일 출간)에 또 임서(林紓, 琴南)의 단편 <부미사(傅眉史)>가 실림으로써 비로소 분명하게 “무협소설”로 표방하였다.
 
그 후 “무협”이라는 단어는 정기간행물의 이름으로 사용되어 평금아(平襟亞)가 편집한 <무협세계>가 있었고, “무협소설” 이 전용명칭은 점차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섭홍생은 일찍이 이로부터 "만약 단지 전용명칭으로 명명한 것부터 말하면 중국의 '무협소설'을 민국의 신생문학 유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50년대 초, 대륙과 대만은 각자 이전의 무협소설을 조사·금지하였고 홍콩, 대만에서는 한 무리의 새로운 무협소설 작가가 출현하여 그들은 과거와는 다른 사회환경 하에서 작품을 썼고 그 작품도 새로운 특색을 갖추었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드디어 1912년에서 1949년 동안의 작품을 '구파무협소설'이라고 부름으로써 홍콩, 대만의 '신파무협소설'과 구별하였다"고 지적한 바 있다.
 
구파무협소설의 1912년부터 1949년까지 38년간의 발전 역정은 대체로 크게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923년 이전에는 무협소설 창작의 저조기이다. 민국 건립 초기에 원세개(袁世凱)가 집권하면서 복고 풍조가 성행하였고 문언문 무협 창작이 한 차례 다시 일어났으나 끝내는 눈앞을 스치는 연기처럼 얼마 되지 않아 곧 사라졌다. 이 한 시기의 백화무협소설로 비교적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겨우 섭소봉(葉小鳳)의 <고수한가기(古戍寒笳記)> (1914년-1915년 <七襄>에 최초 발표)가 있었는데 창작 사상의 기본은 만청(晩淸)의 풍격을 답습하였고, <열혈흔(熱血痕)> 부류의 작품과 유사하였다. 원세개 사후 민국 10년(1921년) 전후에 이르기까지 무협소설의 창작은 점차 활기를 띠어갔는데, 예컨대 백하담수(白下談叟)의 <옹정검협기안(雍正劍俠奇案) (1919년)>, 주하천(朱霞天)의 <청검벽혈록(靑劍碧血錄, 1919년)>, 이정이(李定夷)의 <진해영웅전(塵海英雄傳, 1919년)>, 강협혼(姜俠魂)의 <강호삽십육혼(江湖三十六魂, 1920년)>, 이함추(李涵秋)의 <녹림괴걸(綠林怪傑, 1921년)> 등인데 다만, 모두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는 어려웠고, 당시의 소설 영역은 여전히 사회소설과 애정소설의 천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남상북조(南向北趙)”의 작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서야 비로소 구파무협소설의 창작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되었고 중국무협소설 대번영의 서막을 열어젖히게 되었다.
 
바로 1923년에 평강불초생(平江不肖生, 向愷然)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강호기협전(江湖奇俠傳)>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조환정(趙煥亭)도 장편대작 <기협정충전(奇俠精忠傳)>을 발표하였다. 이 두 편의 무협소설은 각자 특색이 있고 당시 일반 무협소설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어 독자로 하여금 이목을 일신하게 하였다. 두 작품은 서로 비추어 빛남으로써 민국 무협소설의 첫 번째 절정을 열었다. 이 두 부의 소설은 모두 이어 써 이루어진 것으로 1923년에 발표하여 1927년 전후에야 비로소 완성되었으니 5년의 시간 동안 지속되었고 그 작품들이 열어젖힌 절정도 지속되어 쇠하지 않았다. 그 무협소설의 절정 중에서 상개연과 조환정은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주장(主將)으로서 그들의 새 작품이 연이어 세상에 나왔는데, 예를 들면 상 씨의 <근대협의영웅전(近代俠義英雄傳)>, <강호괴이전(江湖怪異傳)>, <옥결금환록(玉玦金環錄)>과 조 씨의 <청말기동대협은일관일사(淸末畿東大俠殷一官軼事)>, <은파삼웅전(殷派三雄傳)>, <영웅주국기(英雄走國記)>, <곤륜협은기(崑倫俠隱記)> 등이 그것이다.
 
그들의 성공은 많은 소설작가들이 무리로 일어나 모방하여 분분(紛紛)히 무협소설의 창작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이끌었다. 예를 들면 요민애(姚民哀)의 <산동향마전(山東响馬傳)>, 심우종(沈禹鐘)의 <유협신전(遊俠新傳)> (이상 1923년-1924년), 장명비(張冥飛)의 <강호검객전(江湖劍客傳)>, 조초광(趙苕狂)의 <강호괴협(江湖怪俠)>, 풍옥기(馮玉奇)의 <원앙검(鴛鴦劍)> (이상 1924년), 허근보(許廑父)의 <중국여해도(中國女海盜)> (1925년), 고명도(顧明道)의 <협골은구기(俠骨恩仇記) (1927년), <괴협(怪俠)> (1928년), <황강여협(荒江女俠)> (1929년), 장순구(張恂九)의 <강호의도전(江湖義盜傳)> (1930년), 병구(病癯)의 <쌍룡검(雙龍劍)> (1931년) 등등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1923년에서 1931년 사이의 이 제1차 무협소설 창작 절정은 주로 상해 지역에 집중되었는데 총괄적으로 말하면 평범한 자가 많았고 고수는 비교적 적었다. “남상북조”가 한 기간을 웅패(雄覇)한 외에 그 가운데 영향이 비교적 큰 사람은 고명도, 요민애, 조초광, 문공직 등 3~4인에 불과하였으며 이 밖에는 대부분 한꺼번에 일시에 나타났지만 성세(聲勢)의 기세만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 북쪽은 조환정을 제외하면 고요하였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1932년이 되어 환주루주(이수민)가 천진(天津) 천풍보(天風報)에 <촉산검협전>을 발표하자 순식간에 그 명성이 평강불초생을 능가해 버렸고, 이를 좇아 백우(宮竹心), 정증인, 왕도려, 주정목, 서춘우(徐春羽)가 북방에서 잇따라 일어나 민국 무협소설에 더욱 큰 제2차 절정을 열어 중국무협소설 예술을 새로운 고봉(高峰)으로 밀어 올렸고 무협소설 창작의 중심은 이에 북중국으로 옮겨졌다.
 
총체적으로 “구파무협소설” 발전의 역정(歷程)을 보면, 제1차 무협 붐 가운데 대표 주자인 상, 조 두 사람은 아직 충분히 자신의 능력을 정확히 알았다고 말할 수 없으며 장점을 완전히 펼쳐냈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그들 두 사람은 무협소설관이 같지 않은데 기인하여 그 작품의 취향이 아주 다르기는 했어도 일정 정도에서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은 버리고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쓴 점이 있다는 것을 면하기 어려웠다. 상개연은 무술에 정통하였으면서도 무술의 묘사에 만족하지 못하여 기이하고 환상적인 전설(傳說)을 추구하였고, 조환정은 무술을 할 줄 모르면서도 한사코 무술을 묘사하여 전설을 꾸밈없고 믿을만하게 쓰려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대조인데 다만 대체적으로 말하자면 상씨 저작(向著)의 기이하고 환상적인 점(奇幻), 조씨 저작(趙著)의 호방하고 장쾌한 점(豪壯), 또 여기에 더하여 애정소설(言情小說)을 쓰다 무협으로 바꾼 고명도의 섬세하고 정교한 문필(文筆)은 구파무협소설 3대 유형의 초기형식을 구성하였고 기본적으로 삼족정립(三足鼎立)의 구조를 다져 중국무협소설 대번영의 서막을 열어 젖혔다.
 
다만, 상개연은 전설을 이어 붙여 작품을 이루었고, 비검법술(飛劍法術)을 묘사하였기 때문에 실제상으로는 완정(完整)한 구상이 결핍되어 이로 인해 통일된 신괴무협소설(神怪武俠小說)의 풍격(風格)을 미처 형성하지 못하였다. 조환정은 제재(題材)를 일화(逸話)에서 취하여 힘써 사실감을 구하였지만 그는 무술을 할 줄 몰라서 마음은 여력이 있어도 힘이 부족하여 마찬가지로 완전한 기격무협소설(技擊武俠小說)의 풍격을 형성할 수 없었다. 고명도는 애정소설의 필법으로 <황강여협>을 썼기 때문에 연지와 분의 분위기가 진하여 보통 우물쭈물하는 부자연스러운 어투를 띠고 있고 또한 스토리의 곡절과 스릴에 연연하여 영웅남녀(英雄兒女)의 심리적, 사회적 제(諸) 방면에 대하여 심층적으로 깊이 탐색하여 충분히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근본을 버리고 지엽적인 것을 애써 추구하였다는데서 벗어나기 어려웠고, 얕은 이해에 흘러 더욱 더 완전한 아녀협정소설의 풍격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풍격 변천의 완전한 형태는 모두 “북파 4대가”의 손에서 비로소 완성을 보게 되었다.
 
민국 초기부터 20년대 말까지 평서예인(評書藝人, 민간 문예의 한 가지로 장편의 이야기를 쥘부채·손수건·딱따기 등의 도구를 사용해 가며 講說하는 사람)의 창작은 북방 무협소설계에서 여전히 성세(聲勢)가 아주 큰 일파였고, 그 영향은 족히 조환정과 한 번 장단(長短)을 겨룰만하였다. 이 일파의 대표인물은 왕치구(王致久)의 양대(兩代) 제자였다. 왕치구는 청말민초의 평서예인으로, <영경승평(永慶升平)> 강술로 유명하였고 그의 문하에 있던 몇 명의 제자는 “걸(杰)”자로 돌림자를 썼는데, 그중 장걸흠(張杰鑫)이 지은 <삼협검(三俠劍)>, 상걸묘(常杰淼)가 지은 <옹정검협도(雍正劍俠圖)>는 모두 한 시대에 유행하였다. 다만 문학의 표준으로 평가하자면 이러한 작품은 실로 우수작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 후 상걸묘의 제자 장진정(蔣軫庭)이 이어 쓴 <금도회칠의(金刀會七義)> 등은 갈수록 질이 더 낮아져 다시는 독자에게 중시받지 못하였다. 총괄적으로 30년대 이전 북방에서 조환정을 제외하고는 무협소설의 창작은 여전히 저속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