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우뚝 솟은 정증인은 진정으로 중국 기격(技擊)무협소설 일파를 대표할 수 있는 유일한 작가이다. 비단 민국 무협소설로 봤을 때 이러할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처럼 중국무술에 전념하여 중국무술의 각종 문파, 무술동작, 초식을 이와 같이 해박하고 진실되며, 생생하고 멋들어지게 써낸 사람은 없다. 정증인은 1938년에 <무림협종(武林俠踪)>을 발표하여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41년, 그의 대표작 <응조왕(鷹爪王)>이 북경 <369>잡지에 연재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만이 갖추고 있던 특색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응조왕은 정 씨 무협소설의 특색을 모은, 크게 성공한 대표작이며 그것은 거친 호기(豪氣), 다채로운 무술과 스릴 있는 스토리를 일체(一體)로 녹여 기격무협소설의 완전한 형태를 형성하였다.
중국의 무술은 비단 고대의 실용적 전투기술인 것만은 아니며 그것은 일찍이 이미 무도화(舞蹈化)되어 사람들의 심미(審美) 대상으로 변하였는데 홍문연(鴻門宴)에서의 항장(項莊)의 무검(舞劍), 공손대랑(公孫大娘)의 검기무(剑器舞)는 모두 저명한 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무술 가운데 반은 진짜고 반은 가짜인, 실용적인 가치가 없는 “화권수퇴(花拳繡腿)” 일파(一派)가 진화해 나왔고 심지어는 동작의 명칭도 모두 시적 정취(情趣)를 띠게 되어, 예를 들자면 “연자천운(燕子穿雲)”, “청정점수(蜻蜓點水)“, ”백학양시(白鶴亮翅)“, ”단봉조양(丹鳳朝陽)“ 등이며, 이러한 명칭은 독자의 마음속에 일종의 시화(詩化)된 정취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결코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중국무술 자체가 매우 높은 심미적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특히 문자로 묘사해낸 것은 형상을 직접 보는 것보다 더욱 풍부한 연상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된다.
정증인의 성공은 처음으로 이 방면의 예술적 매력을 충분하게 발휘했다는데 있다. 그는 무술과 험난한 상황(險境)을 결합해 내는데 아주 뛰어나 무술이 작품 줄거리에 유기적인 구성부분이 되도록 하였다. 정증인도 필치를 사회생활로 뻗기는 했지만 그는 백우처럼 그렇게 광범위하게 세상 인심과 물정에 미치지는 않았고, 집중적으로 방회(幇會)의 내막을 펼쳐 보였는데 이는 아마도 그 자신의 경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듯 하다. 정 씨가 대대로 살아온 천진 서고(西沽) 일대는 북운하(北運河)와 자아하(子牙河)에 바로 인접해 있어서 남쪽의 조운(漕運)이 북경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거쳐야만 되는 상업도시였고, 청 말에 이 일대는 곡물가게가 밀집한 곳 가운데 하나이면서 ”짐꾼(腳行)“, ”건달(混混兒)“이 출몰하던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정 씨는 직접 보고 들어서 암흑가에 대해 비교적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필하(筆下)에서 암흑가의 으스스한 모양과 잔혹하고 악랄함, 신비한 의례(儀禮)를 하나하나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장의 풍격으로 보면, 정 씨에게 환주루주와 백우 같은 그런 문학적 재능은 없었고 그의 문장은 그다지 정미(精美)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주로 두 가지 기본원인에 말미암은 것으로, 하나는 평서(評書)의 영향이 아주 깊었고, 둘은 그가 천진 방언으로 작품을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무술 묘사에 뛰어났고 이야기의 변화를 잘 제어할 수 있었으며 또 일종의 거친 기세가 있었기 때문에 족히 독자를 끌어들일만 하였다. 그의 결점이 장점을 가리지 않아 탁월하게 일가(一家)를 이루었으며 독자적으로 하나의 파를 형성하여 환주루주, 백우와 함께 높은 명성을 누렸다.
정 씨는 일생동안 90부에 가까운 무협소설을 썼는데 대부분이 10만자 전후의 중편이었고 이야기나 인물이 서로 관련되어 있어 모양이 연환투(連環套, 하나가 다른 하나에 연결된 둥근 고리) 같이 큰 고리에 많은 작은 고리가 연결되어 있고 작은 고리끼리는 또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한 작품에서 완결되지 않은 채 남겨둔 약간의 일을 다른 작품에 넘기고, 그 작품의 이야기 앞뒤 관계는 또 많은 다른 작품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상호간 대단히 복잡한 관계가 있어 한 종류를 본 독자로 하여금 다시 다른 종류를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었다. 동시에 독자는 한 두 종류를 본 후에는 스토리, 인물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가 되어 있기 때문에 다시 다른 종류를 보면 쉽게 매료되어 시작 부분부터 곧바로 순조롭게 읽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참으로 요민애가 구상한 연환격(連環格) 소설예술 구조의 매력을 매우 멋들어지게 발휘하였다.
역시 1938년에 화를 피하려고 청도(靑島)로 옮겨 살던 왕도려(王度廬)는 그의 성명작(成名作) <보검금채(寶劍金釵)>를 발표하여 독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어서 또 <검기주광(劍氣珠光)>, <학경곤륜(鶴驚昆侖)>, <와호장룡(臥虎藏龍)>, <철기은병(鐵騎銀甁)>을 썼다. 스토리가 상호 연계된 이 소설은 바로 전세계 독자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학철 5부작(鶴鐵五部作)인데 이야기의 발전 순서에 따라 <학경곤륜>을 시작으로 차례대로 <보검금채>, <검기주광>, <와호장룡>, <철기은병>이다. 이 시리즈 소설은 왕도려의 기초를 확립하고 작가로서의 경력을 다지기 시작한 작품이며 소설에서는 무림호협(豪俠) 세 쌍의 애정과 비극을 그렸는데 이야기의 변화가 매우 풍부하고, 호기로우면서 애절하고, 슬프고 구성지게 씌어져 성공적으로 애정무협소설의 완전한 형태를 창조하였다. 왕 씨 이전에 무협소설에서 혼인, 연애 문제를 언급한 것이 결코 드물지는 않았지만, 혹은 일종의 끼워넣기로 구색을 맞추었고, 혹은 사상적 탐색과 표현이 깊지 않았고, 혹은 무협과 애정 상호간에 동떨어져 내적인 연계가 결핍되어 모두 완전한 형태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왕도려의 애정무협소설은 이상의 여러 가지 결함을 극복하였는데 그는 처음으로 호협의 애정 생활을 소설 묘사의 중점으로 삼아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동시에 비극을 초래한 근원이 봉건적 관념에 있다는 것을 힘써 드러내어 작품의 반봉건적 사상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은 비극을 초래한 원인은 외부의 간섭 혹은 방해(홍루몽에서 그러는 것처럼)가 아니라 당사자 자신의 봉건관념에 그 책임이 있으며, 그것은 일종의 자아의 괴멸인데 예를 들어 이모백과 유수련의 비극적인 연애는 바로 이모백 자신의 봉건관념으로부터 초래된 것이다. 그렇지만 왕 씨의 글에서 이모백에 의해 지켜지는 것은 결코 추상적인 봉건관념 혹은 일반적인 봉건습속(習俗)이 아니고 협객으로서 세상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신성한 규범이어서 그는 유수련의 깨끗한 명성(淸名)을 훼손할 수 없었고 더더욱 맹사소가 자신을 위해 희생한 의기(義氣)를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성격과 심리는 오랫동안 무예가의 덕목(武德)과 협의도(俠道)의 훈도(薰陶)를 받아온 결과였다. 사람마다 모두 이모백이 잘못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람마다 그가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발을 디딘 남자 대장부이며 진정한 협의도(俠義道)이고 경모(敬慕)할만한 대영웅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보다 먼저 자각(自覺)적으로 스스로를 고통스러운 심연(深淵) 속에 던져 넣었는데 이것은 극히 큰 자제력과 희생정신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사람을 감동시키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왕도려는 무술 묘사에 뛰어나지 않아 이 방면에 있어서는 무술에 정통한 정증인에 비하여 한참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종이 위에서 전쟁을 논한(紙上談兵)” 백우에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왕 씨 소설 중의 협객은 모두 일종의 얼굴에 확 스쳐오는 호기(豪氣)로움을 주는데 이는 어쩌면 바로 왕 씨의 특색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그는 무술과 협행(俠行)의 표면적인 묘사에 머물러 있지 않았고 무협정신을 등장인물의 혈액과 영혼으로 변하게 하여 그 사람의 운명을 지배함으로써 무협정신의 인물에 대한 영향의 복잡성을 써냈다. “학철 5부작”은 왕도려의 대표작이지만 그의 흥취는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하다. 그는 타향살이를 하면서 무협소설을 썼고, 늘 고향 북경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풍토(風土)와 인정(人情)을 잊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의 풍토와 민심에 편중된 또 다른 약간의 무협소설은 달리 하나의 정취를 드러내었다. 예를 들면 <수대은표(繡帶銀鏢)> 등도 독자의 많은 사랑을 얻었다. 왕도려의 애정무협소설은 앞 사람들이 도달했던 수준을 크게 초월하였고 이 방면에 있어서 그는 개산입파(開山立派)의 일대 종사이다. 왕도려의 민국 통속소설사에서의 지위 내지는 전체 중국문학사에서의 지위는 그의 애정무협소설로 다져진 것이다.
30~40년대에 무단(武壇)을 웅패(雄覇)하고 한 시대의 문학을 이끌었던 사람은 자연 이, 궁, 정, 왕의 북파 4대가를 먼저 말해야 하겠지만 그 외에도 4대가와 같은 시기에 나아갔고, 무단에서 승부를 다툰 중요한 작가 두 분이 더 있는데 그들은 바로 주정목과 서춘우(徐春羽)이다.
주정목은 일찍이 천진 전화국에서 환주루주와 함께 일하였고 환주루주가 <촉산검협전>을 써서 유명해지자 주 씨는 그것을 보고 자신도 손이 근질거려 <철판동파록(鐵板銅琶錄)>을 써 천진의 <평보(平報)>에 발표하였으나 독자의 주의를 끌지는 못하였다. 그는 초기에는 환주루주를 모방하였으나 재능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후에는 고명도의 방법으로 바꿔 무협, 애정, 모험 세 가지를 하나로 합쳤고, 비로소 두각을 나타냈다. 주 씨가 창작의 성숙기에 도달한 후에는 그의 문장실력과 이야기 구성의 기교는 이미 고 씨를 크게 넘어섰기 때문에 우리들이 모방의 흔적을 알아내기 쉽지 않게 되었지만 만약 우리들이 고명도와 북파 4대가를 남파와 북파의 표준으로 구분할 때 주정목을 둘 사이에 놓고 비교하면 쉽게 그의 남파의 풍격을 알아낼 수 있다.
이러한 남파의 풍격을 요점만 골라 얘기하면 세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 강개하여 비장(悲壯)한 노래를 부르는 영웅의 호기는 적고 지분(脂粉) 향의 고상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농후하다. 둘째, 상상을 달리는 웅대한 모험과 두려움이 적고 세밀하게 짜여진, 작고 정교한 기궤(奇诡)함이 많다. 셋째, 새로운 명사(名詞)를 즐겨 사용한다. 남파 애정무협소설은 고명도 이후에는 어느 남방 작가의 영향도 고 씨와 함께 거론할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고 씨를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더욱 말할 필요가 없다.
'무협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4 (0) | 2016.10.07 |
---|---|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2 (0) | 2016.10.05 |
구파무협소설 개설(槪說) 1 (0) | 2016.10.05 |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名著大觀) 서문 2 (0) | 2016.09.29 |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名著大觀) 서문 1 (0) | 2016.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