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사군은 돌연 놀라면서 백연영(白燕玲)을 떠올렸으나, 백연영은 그의 머릿속에서는 더더욱 부족했다.
제갈자운이 정색하며 말했다.
“아이야, 자신을 속이지 마라, 너는 또 누구를 만났느냐? 이런 일은 감출 필요가 없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거라”
언사군이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말했다.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사부님 곁을 떠난 후 단지 사매와 매 아가씨 그리고 아직 어린 아이인 천산파의 백연영 말고는 만난 사람이 없습니다.
제갈자운이 느리게 말했다.
”네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한천냉무에 들어간 후 필연코 주화입마에 빠질 것이다.“
언사군이 머리를 들고 말했다.
”대사백님,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갈자운이 살짝 탄식했다.
”당년의 나도 너와 똑같았다. 왜냐하면 내가 네 사부를 사랑하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에, 그녀가 소사매(小師妹)였기 때문에 나는 친 누이동생처럼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네 사부를 사도화에게 시집보내려는 네 사조(師祖)의 뜻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나는 결코 네 사부를 사랑할 수가 없었지.“
언사군이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사소운과 매옥 두 사람의 신형이 그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불가능한 사람이다! 불가능한 사람이야!
돌연 한 아리따운 모습이 그의 뇌리를 파고들면서 사소운과 매옥 두 사람의 환영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가 어리둥절한 것이 그 아리따운 모습은 뜻밖에도 옥경(玉鏡) 중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제갈자운이 언사군의 이런 모습을 보고는 느리게 물었다.
”생각이 났느냐?“
언사군은 두눈을 감았다. 그는 마치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이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환영(幻影)이다. 하나의 초상(肖像)일뿐 그 사람을 지금까지 만나본 적도 없다!
언사군이 꽤 오래 생각에 빠져 있다가 비로서 천천히 품에서 천둔경(天遁鏡)을 꺼내 제갈자운에게 건네줬다.
제갈자운이 받아 들고 한참을 살펴보았다.
”아이야,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
언사군이 번쩍 눈을 뜨고 말했다.
”대사백님, 저는 근본적으로 이 소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녀 외에는 더 찾아내지 못하겠고, 게다가 지금 제 머릿속에서 떨쳐낼 수 없습니다.“
제갈자운이 미미하게 웃고는 언사군에게 물었다.
”이 옥경은 어떻게 얻은 것이냐?“
언사군이 옥경을 얻게 된 일과 옥경이 그를 구한 일을 설명했다.
제갈자운이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이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이 소녀가 매우 예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만...“
그러면서 그가 웃었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리려면 진짜 사람이 필요하긴 하다만, 이 사람이 죽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지금은 이미 나이 든 할머니가 됐을 텐데!“
언사군이 얼떨떨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일은 그도 믿기는 하지만 또 다른 똑같이 생긴 소녀가 있으리라는 것을 더 믿었다.
제갈자운이 가벼이 탄식하였다.
”이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때로는 마지막 순간에 드러날 수 있고, 때로는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수도 있다.
언사군이 제갈자운을 쳐다보자 제갈자운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지금도 제 사부를 경애(敬愛)하고 있지만, 나는 아내를 사랑한단다. 나의 그때의 아내를! 그녀가 나에게 잘 대해주었으니까!”
“너는 지금 쉽게 환상에 빠질 수 있고, 만약 이런 생각이 계속 지속된다면 평생토록 너를 고통스럽게 할 수도 있다. 소운과 매옥 아가씨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을 너는 선택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거라!”
언사군이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언사군이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는 제갈자운이 웃으며 말했다.
“네 마음속의 일을 이미 알고 있는 이상 주화입마에 들지는 않을 듯하니 한번 시험해 보거라. 만약 정말로 한기(寒氣)를 견디기 어려우면 억지로 버티지는 말아라.”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옥경을 언사군에게 돌려주고 그에게 한천냉무 가운데 들어가라는 눈짓을 했다.
언사군은 옥경을 품에 넣은 후 천천히 한천냉무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그는 떨리는 것을 참기 어려워 암암리에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한 바퀴 운행하고서야 비로소 조금 나아졌다.
연못 가에 접근하자 더욱 차가움을 느끼고는 마음을 바꿔 생각했다.
사마(四魔)가 이미 출현했는데 자기는 정말로 차례차례 사마 수중에서 굴욕을 당하기를 원한단 말인가? 육파(六派) 장문인의 공력도 자기가 대적할 정도가 안된다. 절대로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
그가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려 공중에서 반 바퀴를 돈 후 흰 돌 위에 내려섰다.
그는 장검와 보따리를 풀어 옆에 두고 가부좌를 틀어 조식에 들어갔다.
시작하자마자 언사군은 주위가 지극히 한랭(寒冷)한 것을 느끼고는 오로지 운공(運功)하여 온기를 유지하는 것만을 생각했다.
언사군은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첫 번째 종성전공법(鐘聲傳功法)에 따라 공력을 운행하였다.
운공 개시 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체내의 진기가 이미 허(虛)로부터 신(神)에 이른 것을 느꼈다. 본래 그가 운공에 들어갈 때는 체내에 단지 한 가닥 열기(熱氣)만을 느낄 수 있었는데 이때는 이미 한 가닥 허물(虛物)이 실물(實物)이 되어 형상이 있는 실체로 바뀌었다.
이때 어느덧 주위가 너무 한랭(寒冷)해지자 그가 숨을 내쉬며 눈을 들어 동굴 쪽을 바라보았다. 이미 깊은 밤이 되어 동굴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한동안 조용히 기를 고른 후 다시 두 눈을 떴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언사군은 할 수 없이 두 눈을 감고 재차 운공에 들어갔다.
사방에 차가운 안개가 내리고 그는 여전히 어느 정도 차가운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이번에는 눈을 감고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진입했다.
두 번째로 눈을 떴을 때 제갈자운이 그의 곁에 와서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 것이 보였다.
“사흘 동안 입정(入定)해 있었다. 이제 음식물을 조금 먹고 다시 입정에 들도록 하자. 너의 정력(定力)이 이렇게 심후(深厚)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언사군이 마음속으로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고 말했다.
“저는 앞서 한차례 깨어났지만 깊은 밤이었습니다.”
제갈자운이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언사군에게 음식을 먹으라는 손짓을 했다.
언사군도 배고픔을 느꼈기에 음식물을 약간 먹었다.
다 먹은 후에 다시 운공을 시작했다.
세 번째 깨어났을 때 사방이 또 칠흑 같았다. 그가 눈을 감았다 떴다 해봐도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마음속에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야안(野眼)도 무공인데 자기가 왜 한번 연습해보지 않았을까!
이때는 막 한 줄기 광선이 동굴 안으로 쏘아져 들어오고 있어서 언사군은 그 별빛이 비친 벽을 보니 희미하게 검을 든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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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자운이 매옥을 한번 쳐다보자 매옥이 제갈자운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
“만배(晩輩)에게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언사군이 다급히 말했다.
“매 아가씨, 제 사부님은...!”
매옥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영사(令師)께서는 곧 폐방(敝幇)에 오실 거예요. 제가 정성을 다해 모시면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릴께요”
말을 마치자 언사군을 한번 더 보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제갈자운이 옆에서 보고 있다 언사군에게 물었다.
“저 여자아이는 유능하고 예의 바른 아이라 장래 전도(前途)가 양양(洋洋) 해 보이고, 너한테도 잘해주는 것 같구나.”
언사군이 말했다.
“매 아가씨가 저를 한번 구해줬습니다.”
제갈자운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돌연 언사군에게 물었다.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언사군이 어리둥절해 말했다.
“사백님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갈자운이 가볍게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야! 젊은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분명히 해서 장차 다른 사람과 자신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라.”
언사군이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매옥, 사소운 두 사람의 아리따운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뒤섞였다. 그는 마치 두 사람 모두에게 일말의 애정이 있는 것 같다가도 또 아무에게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내심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제갈자운이 또 말했다.
“우리 여산으로 가자, 거기 도착하면 네게 해줄 말이 있다.”
말을 마치자 그가 몸을 일으켜 앞쪽으로 달려갔다. 언사군이 그 뒤를 따르며 머리를 들어 제갈자운을 보니 두 눈으로 전방을 직시하며 마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여 감히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단지 따라가기만 했다.
본래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제갈자운이 그에게 물으니 비로소 좀 심각함을 느꼈다. 이런 일은 결코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
다음날 해 질 녘에는 이미 여산에 도착해 두 사람은 산속에서 하룻밤 노숙(露宿) 한 다음 비로소 그 고동(古洞)을 찾아 나섰다.
제갈자운이 언사군을 이끌어 어둠침침하고 좁디좁은 어떤 골짜기(狹谷)로 걸어 들어갔다.
1리(里) 정도를 들어간 후 또 좁은 틈을 뚫고 들어가고 다시 한참을 걷자 앞쪽에 산동(山洞) 하나가 나타났다.
산동에 들어서자 빛이 갑자기 밝아졌는데 동굴의 사방 벽은 온통 도식(圖式)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이는 앉아 있고, 어떤 이는 서 있고, 검을 들고 주먹을 쥐고 있는 등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조각되어 있었다.
언사군은 단죽군의 절묘한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쪽을 한번 보자 정면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연못 가운데 하얀 돌 한 개가 놓여있고, 폭포수가 거꾸로 돌 들보(石梁) 위에 떨어져 변한 차가운 안개가 그 하얀 돌을 에워싸고 있었다. 언사군은 아직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한기(寒氣)가 압박하는 것을 느끼고는 다소 놀랐다.
제갈자운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언사군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네 사조 어르신께서는 한천냉무(寒泉冷霧) 가운데서 한 차례 주화입마(走火入魔)를 겪은 적이 있다.”
언사군은 마음속으로 놀랐다. 이 한천냉무가 사람을 주화입마에 들게 할 줄이야! 이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이런 건 희기(稀奇)한 것도 아니다. 만약 지극히 높은 정력(定力)이 없으면 틀림없이 빨리 이루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欲速則不達)!, 너도 본래는 한천냉무에 적합하지 않지만, 너에게 일러줄 이야기가 있다.”
언사군이 한참 침묵하다 말했다.
“대사백님! 제가 이틀 동안 생각해봤는데 황산(黃山)에서 대사백님이 물었던 말에 대해 저는 아직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갈자운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넌 아주 성실하구나,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네 사부에게는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겠느냐?
언사군은 잠시 망설였지만 제갈자운의 엄중한 안색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20여년 전, 나도 청년이었을 때 나는 네 사조님을 따라 서북(西北)에 살면서 자주 대막(大漠)을 오갔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때 불과 20세 전후여서 바로 지금 너와 비슷한 나이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두 눈은 비천(飛泉)에서 흩뿌려지는 물방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지난 일에 빠져든 듯이. 초원, 대막, 준마, 보검 그리고 한 소년!
제갈자운이 말을 오랫동안 멈추었다 다시 말했다.
”그때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나를 아주 좋아했었고 나도 그녀를 매우 좋아한다고 느꼈었지. 우리 둘은 한 쌍의 연인이 되었는데 그녀는 천산성응(天山聖鷹)의 딸이었단다. 결국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지“
언사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알고 보니 대사백님이 지난 일을 말씀하시는거구나, 기왕 그렇게 되었다면 그건 아주 아름답고 원만한 거 아닌가?“
제갈자운이 두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아이야!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많은 얘기가 남아 있단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함께 있었고, 그녀는 아름다웠단다. 하지만 나중이 되자 네 사부의 부친이 네 사부를 사도화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일은 너도 알고 있는 일이지. 그날에서야 비로소 나는 돌연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장가든 것은 단지 그녀가 네 사부와 약간 비슷한 곳이 있어서였고 내 마음속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네 사부라는 것을“
(역자 註 : 원문에는 「네 부친이 네 모친을 사도화에게 시집보냈다」고 되어 있으나 문맥상 맞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어 수정함)
언사군이 크게 놀랐다. 사도화가 그의 사부와 결혼했지만 동방흑(東方黑)이 그의 사부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대사백도 그의 사부를 몰래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갈자운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 이전에는 나 자신도 몰랐었다. 너는 그 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결국에는 그녀가 알게 되어 나를 떠나버렸다.“
말하면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언사군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기가 쉽지 않다.
제갈자운이 또 말했다.
”정말로 그 전의 내가 조금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때 감히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러한 결말을 맞게 되었던 거지. 네 사부는 성품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 나는 감히 나의 내심(內心)을 알지 못했던 거다.“
그가 돌연 고개를 들며 언사군에게 말했다.
”아이야! 지금의 너는 그때의 나와 똑같다. 어떤 여자가 다른 한 사람과 비슷해서 혹은 은혜를 고마워해서 짐짓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지 마라. 그런건 너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모두 좋지 않단다.“
언사군의 마음이 흔들렸다. 사소운과 매옥 두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네 사매와 매옥 두 사람에게 모두 진심인 것 같은데 도대체 네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언사군은 사도화가 왜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사도화의 안색이 회복되자 황포 노인이 천천히 토산에서 걸어 내려왔다.
사교랑도 황포 노인이 출현하자 저도 모르게 미미하게 경이(驚異)로운 기색을 드러내며 천천히 사도화의 곁으로 물러났다.
황포 노인이 두 사람을 한눈에 쓸어본 후 언사군에게 말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언사군이 급히 생각해보고 말했다.
"전배(前輩)는 제 대사백(大師伯)이신 제갈(諸葛) 사백이시지요?“
황포 노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언사군은 마음속으로 기뻤다.
”저 노인이 바로 무토신군(戊土神君) 제갈자운(諸葛子雲)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제갈자운이 무공은 비록 사도화에 미치지 못했지만 결국은 단죽군의 장문(掌門) 대제자(大弟子)라 이전의 위엄이 아직 남아 있었고, 때마침 사도화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을 때여서 자연히 겁이 난 것이었다.
그가 언사군에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떠나가자 언사군은 매옥을 손짓으로 불러서 제갈자운을 뒤따라갔다.
사도화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예전의 사형(師兄)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언사군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괜찮겠지만 만약 거짓말이라면... 만약 일양수가 죽지 않았다면 자기를 쉽게 놓아두지 않을 것이다!
언사군은 매옥과 함께 제갈자운을 따라 걸어갔다.
산봉우리 하나를 지나자 제갈자운이 비로소 걸음을 멈췄다.
언사군이 앞으로 나아가 예를 표했다.
”사질(師姪) 언사군, 대사백님을 뵙습니다.“
매옥도 제갈자운을 향해 예를 표하니 제갈자운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언사군에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강호의 일에 대해 듣지 못했다. 이번 천잔칠정의 일에도 나는 본래 참여하길 원치 않았지만 그 안에 본문의 일도 있다는 것을 알고는 비로소 네 행방을 쫓은 것이다. 네 사부는 잘 있느냐?“
언사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은 잘 계십니다. 대사백님의 염려 감사합니다.“
제갈자운이 가벼이 탄식하며 말했다.
”사도화의 습성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는데 장문대제자로서 내가 네 사부에게 많이 미안하구나!“
언사군은 제갈자운이 말하는 것이 20년 전의 일임을 알기에 무언(無言)으로써 답을 한다는 듯 단지 침묵하였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8월 중추의 약속은 천하무림이 다 알고 있다. 만약 사도화가 옛 습성을 바꿨다면 오행검진(五行劍陣)을 펼쳐 천잔칠정을 확실히 손에 넣을 수 있을 텐데, 지금은 다섯 중 한 명이 빠졌고, 석년(昔年)의 네 마두(四魔)도 다시 출현해 천잔칠정에 손을 댈 뜻이 있는 것이 분명해서 아마도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될 것 같다.
언사군도 4마의 공력을 본 적이 있어서 만약 4마가 끼어든다면 아마도 천잔칠정은 틀림없이 그들 차지가 될 것을 알았다.
천잔수 무공의 고강함은 그가 10년 전에 회안봉에서 본 적이 있고 지금까지도 인상이 깊었다. 4인이 자만하고 있고 천잔수 때문에 은거했다고 말하지는 않지만 4인의 무공이 아무리 높다 해도 실로 천잔수에 비해서는 한참 차이가 났다.
제갈자운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출수(出手) 해봐야 소용이 없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고 이 일은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없고 단지 너 혼자 할 수 있다.
언사군이 몸을 굽히며 말했다.
”이 일은 본래부터 사질의 일이었습니다.“
제갈자운이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도 그런 뜻이 아니다. 내 의견은 내가 아는 바에 의하면 너는 천부적인 자질이 뛰어나다고 들었다. 네 사부는 너의 상세를 치료하느라 돌아가 5년을 정양(靜養)하고 나서야 비로소 공력이 회복되었다. 너는 실제로는 단지 5년 동안만 무공을 배운 것인데 5년 만에 이 정도 성취를 거둔다는 건 보통 사람으로서는 다다를 수 없다.
나는 네가 최단기간 내에 공력을 갑절로 늘릴 수 있기를 바란다. 너도 대전구식을 배웠으니 어쩌면 그들과 승부를 다툴 수도 있을 것이다. 4인이 비록 마두들이기는 해도 무림 선배로서의 신분이 있으니 젊은 사람에게 꺼리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너도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어서 혹시라도 한번 이길지도 모른다.“
언사군은 얼떨떨했다. 그는 무토신군이 자기에 대해 이렇게나 많이 알고 있는 것이 기괴(奇怪) 했다. 틀림없이 잘 알아봤을 테지만 그럼 자기는 응당 어떻게 해야 하나?
제갈자운이 한동안 침묵하다 입을 뗐다.
”이 일이 아주 어렵기는 해도 내 생각에 너는 해낼 수 있다고 본다“
언사군이 약간은 의심을 품고 제갈자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갈자운이 말했다.
“네 사조(師祖)께서 당년 세상을 떠나실 때 일찍이 내게 한 가지 일을 말씀해 주신 적이 있는데 그건 네 사부조차도 모르는 일이다. 네 사조께서 비록 당년 천잔수의 손에 패하시긴 했어도 반대로 천잔수도 네 사조의 신상(身上)에서 얻은 이익이 적지 않았었다. 네 사조의 무공과 초식 모두 천잔수보다 위였지만 공력이 미치지 못했단다.”
“오행검진은 다섯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하고 궤이함이 으뜸인 검식을 더하면 천잔수를 검 아래 둘 수 있다. 네 사조께서는 연공(練功) 하던 동굴에 그 어르신의 모든 무공의 정화(精華)를 남겨 두셨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형제(師兄弟) 간에 스스로 다툼이 일어나지만 않았더라면 결코 천잔수의 손 아래 패하지 않았을 텐데.”
언사군이 말했다.
“사백님의 뜻은 제가 동굴에 들어가 한번 보라는 건가요?”
제갈자운이 희미하게 한번 웃고 말했다.
“이 동굴은 오직 나 혼자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게다가 동굴 안에는 단지 그런 무공들만이 아니라 가장 주요(主要)한 것은 한천냉무(寒泉冷霧) 인데 내공 수련에 도움이 된단다”
언사군도 한천냉무가 뭔지 알지 못해 다만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만 말했다.
제갈자운이 머리를 들어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한 후 말했다.
“여산(廬山)에 있다.”
말을 마치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말했다.
“당년 네 사조 그 어르신이 여산을 유람하실 때 발견하시고는 산동(山洞) 안에서 1년을 지내셨다. 동굴 안에 있는 한 점 한 방울 모두가 그 어르신의 심혈(心血)이 아닌 것이 없다.”
언사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단죽군이 당년 그런 곳에 있었는데 왜 공력이 천잔수에게 미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빠, 엄마가 지금까지 싸워도 못 이기는데 빨리 나서서 저 언사군이라는 자를 붙잡아요!“
사도화가 그말을 듣고도 여전히 언사군에게 나아가지 않았다.
매옥이 한 손으로 장검을 뽑아 들고 웃음을 지으며 사도화에게 말했다.
”만배(晩輩) 매옥이 전배(前輩)의 고초(高招)를 가르침 받겠습니다.“
사도화가 손을 뒤집어 이장(二掌)을 쪼개내자 매옥은 장검을 한번 낮추고 한번 올려 사도화가 공격한 장력을 되돌려 보냈다.
사도화는 본래 매옥이 일격도 감당하지 못할 줄 알았다가 매옥의 검법이 이처럼 정묘하고 기이한 것을 보자 어리둥절하였다. 사도화도 젊었을 때 천하를 주유(周遊)하여 견문(見聞)이 넓었는데 매옥의 검초가 매우 눈에 익었다. 이 세상 사람 가운데 어자결(御字訣)의 요점(要點)을 장법 상으로 얻은 사람은 당년에 그에게 대전구식(大顚九式)을 전수해준 일양객(一陽客)이지만, 검법 상으로는 남해(南海) 철면관음(鐵面觀音)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보아하니 이 매옥은 철면관음의 도제(徒弟) 아니면 도손(徒孫)이리라!
돌연 홍갈자 사교랑이 그때 언사군이 뿌리친 사전성월(斜顫星月) 수법에 의해 7, 8장(丈) 바깥으로 나가떨어지고 백의소년이 놀라 부르짖는 것이 보였다.
사도화가 놀랐다.
언사군의 이 일초는 바로 대전구식 중의 신법이어서 보자마자 잘 알 수 있었지만, 언사군의 신형의 교묘함은 그로서도 미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하는 사이에 백의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아빠! 빨리 엄마 구해줘요“
사교랑은 화가 나서 온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도 이것이 대전구식 가운데 정묘한 초식이라는 걸 알아보았다.
다만, 그녀는 현재 세상에서 사도화만이 구사할 줄 알고 있었고 사도화는 자기 아들한테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거꾸로 그걸 언사군에게 전수하다니!
그녀가 차가운 어조로 백의소년에게 말했다.
”홍아(鴻兒)! 검을 가져오너라!“
그 백의소년이 앞으로 나아가 검을 사교랑에게 건넸다.
사교랑이 코웃음치며 말했다.
”이것은 네 아빠가 그에게 가르친 대전구식이다!“
사도화가 급히 언사군에게 다가갔다.
매옥이 검을 내어 가로막으면서 말했다.
”전배(前輩)! 걸음을 멈추십시오!“
사도화는 단죽군의 네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사람이었다. 자질이 양호했을 뿐만 아니라 운 좋게 기회도 만나서 대전구식에 있어서 그와 필적할 자가 없었고, 그의 혼원장력(混元掌力) 역시 그에 미칠만한 자가 거의 없었다.
그의 장식(掌式)이 한번 흡수하고 한번 거두어들이는 사이에 가볍게 매옥의 장검을 밀어내고 언사군을 향해 걸어갔다.
사교랑이 화가 나 사도화에게 말했다.
”당신 참 좋은 일을 했구먼, 자기 아들한테는 대전구식을 전해주지 않으면서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서 그자가 제 마누라와 아이를 때리게 하다니!“
사도화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넋이 빠진 듯 언사군만 바라보다 천천히 발걸음을 멈추고 언사군에게 물었다.
”이 일초를 어디서 배웠느냐?“
언사군이 태연하게 웃었다.
”그건 물을 필요 없습니다.“
사교랑이 옆에서 듣기에도 기괴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언사군이 배운 건 결코 사도화가 전수하지 않은듯한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사도화는 언사군이 대답하지 않는 것을 손을 써 전광석화처럼 언사군의 손목을 잡아 언사군을 바깥으로 던져버리려고 했다. 그것은 바로 대전구식 중의 일초 전강도해(顚江倒海)였다. 언사군은 몸이 던져지려는 순간 길게 한번 숨을 들이마시고 사도화의 오른손이 풀리자 신형을 꼿꼿이 세워 거꾸로 사도화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바로 천지역위(天地逆位)의 일초가 또 시전 되었다.
” 흥” 사도화가 코웃음을 쳤다.
비록 언사군이 그를 던지지 못했지만 그 역시 언사군을 던지지 못했던 것이다.
언사군이 신형을 떨어뜨려 미처 지면에 닿기 전에 사전성월(斜顚星月)의 초식을 또 펼쳤다.
그의 신형이 날며 회전하는데 따라 사도화가 세 번 공중제비를 넘었다.
사도화는 언사군에 의해 나가 떨어지자 마음속으로는 이미 언사군이 고인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비해 자기는 단지 구식(九式)을 알고만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자신에 비해 언사군은 변화가 자유자재인데, 현 세상에 이런 정도로 대전구식에 정통하여 언사군을 가르친 고수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당연히 언사군이 대전구식을 동중객(洞中客) 한테 얻은 것을 알지 못했다. 일양수(一陽叟)는 단지 동중객의 2대 제자일 뿐이었다. 언사군이 착지(着地) 했을 때 그는 지금 사도화는 분명히 경악 상태라 기회를 틈타 떠나려면 지금이 가장 좋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다급히 매옥에게 말했다.
“우리 갑시다”
사도화가 신형을 뒤집으며 언사군에게 말했다.
“못 간다. 너 이 몇 초(招)를 어디서 배웠느냐?”
그는 언사군에 의해 한번 던져지자 정신이 완전히 뚜렷해졌다. 평상시 그는 완전히 후회 반(半 ), 한스러움 반의 상태여서 처음에는 미친 척하다가 어느 정도는 진짜로 미치게 되었던 것인데 이때 다시 일양수를 기억해 내고는 저도 모르게 언사군에게 캐물은 것이다.
언사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가요?”
사도화가 당년 대전구식을 얻게 되었을 때는 이미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었고, 게다가 일양수는 결코 정파의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혹시 일양수가 그에게 숨긴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언사군은 어떻게 온전한 대전구식을 얻었을까!
그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언사군에게 물었다.
“누구냐?”
언사군이 차갑게 말했다.
“그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당신이 그를 만나려면 자살(自殺)한 후에야 만날 수 있습니다.”
사도화는 약간 망연(茫然)한 상태인데 사교랑은 이미 사도화가 전수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검을 고쳐 세우고 나와 사도화에게 말했다.
“구태여 이런 저런 말 길게 할거 뭐 있어요? 죽여 버리면 되지”
그녀가 돌진하자 매옥은 사도화가 공력이 너무 높아 그녀로서는 감히 상대할 수 없지만 언사군은 일련(一連)의 괴초(怪招)가 있어서 그나마 대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장검을 비스듬히 내어 사교랑의 수검(數劍)을 받아내고 이어서 몇 검을 공격했다.
남해취봉(南海翠鳳)은 철면관음의 유일한 제자라 그 사부의 무공을 얻었고, 매옥의 공력은 이때의 언사군의 공력보다 높았기 때문에 그녀가 장검을 날리고 뒤집으면서 어자결(御字訣)로 사교랑의 검초를 전부 받아냈다.
사도화가 머리를 들어 언사군을 보며 느리게 말했다.
“너는 내가 너를 죽이려고 한다고 말하지는 않는구나!”
돌연 그가 눈빛을 들어 보더니 안색이 급변했다.
언사군은 갑자기 사도화가 그를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라 미처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는데 사도화의 안색이 변하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작은 토산(土山) 위에 황포(黃袍) 노인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는데 회백색(灰白色) 수염이 가슴 앞에 날리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누르고 있었다.
미풍이 도포 자락을 날리는데 사람을 두렵게 하는 눈빛을 쏘아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