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자운이 매옥을 한번 쳐다보자 매옥이 제갈자운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말했다.
“만배(晩輩)에게 다른 일이 있어서 먼저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언사군이 다급히 말했다.
“매 아가씨, 제 사부님은...!”
매옥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영사(令師)께서는 곧 폐방(敝幇)에 오실 거예요. 제가 정성을 다해 모시면서 그대가 오기를 기다릴께요”
말을 마치자 언사군을 한번 더 보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제갈자운이 옆에서 보고 있다 언사군에게 물었다.
“저 여자아이는 유능하고 예의 바른 아이라 장래 전도(前途)가 양양(洋洋) 해 보이고, 너한테도 잘해주는 것 같구나.”
언사군이 말했다.
“매 아가씨가 저를 한번 구해줬습니다.”
제갈자운이 머리를 끄덕이고는 돌연 언사군에게 물었다.
“네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느냐?”
언사군이 어리둥절해 말했다.
“사백님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갈자운이 가볍게 탄식하는 어조로 말했다.
“아이야! 젊은이들은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분명히 해서 장차 다른 사람과 자신을 그르치지 않도록 해라.”
언사군이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매옥, 사소운 두 사람의 아리따운 모습이 그의 뇌리에서 뒤섞였다. 그는 마치 두 사람 모두에게 일말의 애정이 있는 것 같다가도 또 아무에게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내심으로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제갈자운이 또 말했다.
“우리 여산으로 가자, 거기 도착하면 네게 해줄 말이 있다.”
말을 마치자 그가 몸을 일으켜 앞쪽으로 달려갔다. 언사군이 그 뒤를 따르며 머리를 들어 제갈자운을 보니 두 눈으로 전방을 직시하며 마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여 감히 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단지 따라가기만 했다.
본래 그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제갈자운이 그에게 물으니 비로소 좀 심각함을 느꼈다. 이런 일은 결코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
다음날 해 질 녘에는 이미 여산에 도착해 두 사람은 산속에서 하룻밤 노숙(露宿) 한 다음 비로소 그 고동(古洞)을 찾아 나섰다.
제갈자운이 언사군을 이끌어 어둠침침하고 좁디좁은 어떤 골짜기(狹谷)로 걸어 들어갔다.
1리(里) 정도를 들어간 후 또 좁은 틈을 뚫고 들어가고 다시 한참을 걷자 앞쪽에 산동(山洞) 하나가 나타났다.
산동에 들어서자 빛이 갑자기 밝아졌는데 동굴의 사방 벽은 온통 도식(圖式)으로 채워져 있다. 어떤 이는 앉아 있고, 어떤 이는 서 있고, 검을 들고 주먹을 쥐고 있는 등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조각되어 있었다.
언사군은 단죽군의 절묘한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앞쪽을 한번 보자 정면에는 연못이 하나 있는데 연못 가운데 하얀 돌 한 개가 놓여있고, 폭포수가 거꾸로 돌 들보(石梁) 위에 떨어져 변한 차가운 안개가 그 하얀 돌을 에워싸고 있었다. 언사군은 아직 가까이 가지 않았는데도 벌써 한기(寒氣)가 압박하는 것을 느끼고는 다소 놀랐다.
제갈자운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언사군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네 사조 어르신께서는 한천냉무(寒泉冷霧) 가운데서 한 차례 주화입마(走火入魔)를 겪은 적이 있다.”
언사군은 마음속으로 놀랐다. 이 한천냉무가 사람을 주화입마에 들게 할 줄이야! 이런 일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이런 건 희기(稀奇)한 것도 아니다. 만약 지극히 높은 정력(定力)이 없으면 틀림없이 빨리 이루려다 오히려 이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欲速則不達)!, 너도 본래는 한천냉무에 적합하지 않지만, 너에게 일러줄 이야기가 있다.”
언사군이 한참 침묵하다 말했다.
“대사백님! 제가 이틀 동안 생각해봤는데 황산(黃山)에서 대사백님이 물었던 말에 대해 저는 아직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갈자운이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넌 아주 성실하구나, 그렇지만 이 이야기를 네 사부에게는 말하면 안된다. 왜냐하면 그녀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겠느냐?
언사군은 잠시 망설였지만 제갈자운의 엄중한 안색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20여년 전, 나도 청년이었을 때 나는 네 사조님을 따라 서북(西北)에 살면서 자주 대막(大漠)을 오갔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때 불과 20세 전후여서 바로 지금 너와 비슷한 나이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말을 하면서도 그의 두 눈은 비천(飛泉)에서 흩뿌려지는 물방울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지난 일에 빠져든 듯이. 초원, 대막, 준마, 보검 그리고 한 소년!
제갈자운이 말을 오랫동안 멈추었다 다시 말했다.
”그때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나를 아주 좋아했었고 나도 그녀를 매우 좋아한다고 느꼈었지. 우리 둘은 한 쌍의 연인이 되었는데 그녀는 천산성응(天山聖鷹)의 딸이었단다. 결국 우리는 결혼하게 되었지“
언사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알고 보니 대사백님이 지난 일을 말씀하시는거구나, 기왕 그렇게 되었다면 그건 아주 아름답고 원만한 거 아닌가?“
제갈자운이 두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아이야! 이야기가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아직 많은 얘기가 남아 있단다.“
그리고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는 함께 있었고, 그녀는 아름다웠단다. 하지만 나중이 되자 네 사부의 부친이 네 사부를 사도화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일은 너도 알고 있는 일이지. 그날에서야 비로소 나는 돌연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녀에게 장가든 것은 단지 그녀가 네 사부와 약간 비슷한 곳이 있어서였고 내 마음속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네 사부라는 것을“
(역자 註 : 원문에는 「네 부친이 네 모친을 사도화에게 시집보냈다」고 되어 있으나 문맥상 맞지 않는 것으로 추정되어 수정함)
언사군이 크게 놀랐다. 사도화가 그의 사부와 결혼했지만 동방흑(東方黑)이 그의 사부를 연모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대사백도 그의 사부를 몰래 연모하고 있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제갈자운이 느릿하게 말했다.
”그 이전에는 나 자신도 몰랐었다. 너는 그 후에 내가 어떻게 했는지 아느냐? 결국에는 그녀가 알게 되어 나를 떠나버렸다.“
말하면서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언사군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알기가 쉽지 않다.
제갈자운이 또 말했다.
”정말로 그 전의 내가 조금도 몰랐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때 감히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러한 결말을 맞게 되었던 거지. 네 사부는 성품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 나는 감히 나의 내심(內心)을 알지 못했던 거다.“
그가 돌연 고개를 들며 언사군에게 말했다.
”아이야! 지금의 너는 그때의 나와 똑같다. 어떤 여자가 다른 한 사람과 비슷해서 혹은 은혜를 고마워해서 짐짓 그녀를 좋아하는 것처럼 하지 마라. 그런건 너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모두 좋지 않단다.“
언사군의 마음이 흔들렸다. 사소운과 매옥 두 아가씨의 아름다운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제갈자운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너는 네 사매와 매옥 두 사람에게 모두 진심인 것 같은데 도대체 네 마음 속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