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자연 작품

사마자연 2016. 8. 23. 11:54 Posted by 비천호리

작품명

책수

주인공

비 고

情俠

3

楚無情李嬌嬌

대만판은 4, 다른 제목 江湖豪放女招魂客棧楚無情

一劍寒山河

3

李韶庭

英雄歲月

4

呂四海

주인공은 一劍寒山河 주인공 이소정의 제자

一字劍

3

方衣路金花

다른 제목 一字魔劍

無刃劍

3

林佛劍

다른 제목 佛劍情天

煞劍情狐

3

江夢秋方梅影

다른 제목 七劍九狐

紅粉幹戈

4

南宮俊

대만皇鼎에서 재판시 다른 제목 紅粉刀王(4), 홍콩판 碧血紅粉

新月劍

4

杜雲

대만재판은 新月劍芙蓉劫으로 나눔. 다른 제목 寒月劍

浪子燕

3

대만재판은 浪子燕鐵馬雲裳. 다른 제목 多情浪子六世英俠

八駿雄飛天馬行空

2+2

楚平

다른 제목天馬行空(5)

彩鳳飛

2

傅玉麟莫玉秀

다른 제목 魔域梟雄

金玉盟

司馬

劍在江湖

1

駱凡

英雄

3

梅山白

다른 제목 劍破九重天

劍情深劍情深續

2+2

古秋萍

燕歌行燕趙雄風

3+2

張自新

다른 제목 斬情劍, 燕趙雄風

千樹梅花一劍寒螭龍鼎

3+2

林淇梅華

다른 제목 風雲奇俠錄梅花劍

孤劍行遊子引

3+2

慕容平

다른 제목 金陵柔劍(5)

金僕姑修羅刀

3+2

金蒲孤

다른 제목 玄弓幻劍錄冷劍烈女

荒野遊龍

4

謝文龍

다른 제목 江湖三六指

環劍爭輝

3

大英雄妙英雄

2+2

杜英豪

菩提劍

羅菩提

다른 제목 屠龍奇俠傳八奇屠龍

刀下不留人

3

海平侯

明珠劫

2

綠珠

魔劍心焰血鴛劫

3+2

夏侯傑

다른 제목 魔劍幻情記, 仙劍

鷲與鷹

2

郭英石鷲

羅刹劫

3

司馬瑜

다른 제목 萬丈豪情

一劍嘯西風

3

南宮少秋

다른 제목 劍嘯西風情劍山河. 遊劍京華는 모방작.

玉玲瓏·玲瓏玉

2

古如萍

血雁盟

2

江湖夜雨十年燈

7

韋明遠

제갈운 대신 이어서 완성. 성명작

劍神

2

史劍英

다른 제목 九州封神錄

風塵三俠

3

李靖紅拂

禁宮情劫

2

張昌宗

홍콩판 禁宮情仇?

帝疆魅影

2

斷臂刀

3

王剛

六月飛霜

3

水文

東入陽關無故人

3

洪九

다른 제목 天魔心法

碧血紅

金陵俠隱

3

다른 제목 血魂劍

勇士傳

士元

다른 제목 無敵勇士

萬里江山一孤騎

關山月

다른 제목 大漠追魂令

玉露金童

陳劍

南疆飛龍傳

梅玉

帝疆魅影?

鐵血紅

鐵錚玉妙容

無敵英雄

鋒驚龍

3. 무협의 장래 전망
 많은 독자를 보유한 통속소설도 그가 차지하는 지위가 당연히 있어야 할까?
비록 협패작가의 창작동기가 “생계”를 위한 경우가 많지만, 명가 작품의 인물, 구성, 감정부터 도리에 이르기까지의 의미가 반드시 정통문예의 가치보다 약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또, 더군다나 독자 수 비율의 차이로 보면 그 영향력은 한결 우월하다. 20세기 중엽 무협소설이 대중의 환영을 받을 당시 부정적인 면의 배척과 멸시의 그물도 동시에 펼쳐졌다.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자 중에는 읽지도 않고서 나쁘게 말하는 고루하고 진부한 사람과 공개적으로는 악평을 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몰래 흥미진진하게 보는 위군자(僞君子)도 있었고, 점잖은 체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두 부류가 똑같이 꽉 막히고 견식이 천박한 필부였다.
20세기 후기에 이르러서야 약간 개선되어 협패소설류는 정시(正視, 똑바로 보다)를 받게 되었고(여전히 重視는 아니다), 협패작가도 마침내 떳떳하게 평시(平視, 나란히 보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당연히 仰視는 아니다).

실로 문헌사료는 대만협패가 50년대에 시작되어 60년대에 흥성하였고, 마침내 70년대의 퇴조(退潮)와 80년대의 쇠퇴(衰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노정(路程)에서 하이라이트를 받은 시기는 기실 10년을 넘지 못한다. 밀물이 들어오듯 일어났다 썰물이 빠져나가듯 쇠락하였는데 통속문학사 측면에서 말하자면 마치 혜성같이 그 특이한 밝고 아름다움을 하늘 끝에 긋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매화나무 아래서 잠을 깨었을 때 이미 달은 지고 하늘이 밝아오고 있는(明月梅花一夢)는 듯한 비애를 느끼게 된다.

섭, 임 두 분이 일찍이 쇠락의 원인을 분석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에서 약간의 보충만 하고자 한다. 확실히 내 친구 피술민(皮述民) 교수의 말처럼 무협소설의 흥성은 “독자의 고민”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일반문예 창작의 동력이 작가의 “고민의 상징”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독자들의 고민은 반드시 시대의 변화를 따라 바뀌는 것이라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여 대중의 독서 취미가 바뀌었을 때 사람마다 한권씩 다 가지고 있었던 성황(盛况)은 자연히 더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협패의 장래는 과연 어떠할까?
이대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최고 수위(水位)를 재현할 것인가?
 필자가 우언(寓言) 하자면, 혹은 인류 종(種)이 유전(遺傳)하는 “투쟁”의 원형(原型)에 기초하거나 혹은 인간세상에서 영원히 피하기 어려운 불공평에 말미암아 협패의 표현모델은 독자의 쌓인 불만을 위하여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식의, 없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도원(桃源)을 제공할 것이며, 보아하니 그것이 숙명인 것 같다.

 장조(漲潮)가 <유몽영(幽夢影)>에 적기를 “가슴속 작은 불만은 술로 달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큰 불만은 검이 아니고서는 풀 수가 없도다!(胸中小不平,可以酒消之;世間太不平,非劍不能消也!)”라고 하였다. 맞다! 그러니 통쾌하게 술을 마시자! 당신의 인생 중 어쨌든 불가피하게 마주친 큰 악당(巨奸大憝)의 부류나 사악한 무리와 이치를 따졌는지 생각해 보라,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국법(國法)에 호소하자니 만족스럽지 않거나 더뎌서 도움이 되지 않은 관계로 단지 실컷 때려 주거나 끝내는 장검(長劍)이 그를 다섯 걸음에 피를 흘리도록(血流五步) 해야만 비로소 통쾌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호전> 가운데 “노제할이 진관서를 때리다(魯提轄拳打鎭關西)“ 부분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까닭이며 억만인(億萬人)의 마음이며, 난세 심지어는 말세를 만나서도 간악(奸惡)한 자를 몹시 미워하고 영웅호걸을 동경하는 공통의 심리이다.
 더구나 제거하는 쾌감의 가상균형 외에도 독자들은 작가들의 감정과 이념을 함께 나눈다. 감정에 의한 감화든 또는 도리에 의한 반성(反省), 사고(思考)든 상관없이 모두 문예기능이 사회를 개선하는 효과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문체(文體)나 장르(文類)의 성쇠(盛衰)는 마치 왕조의 흥망과 흡사하게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늘 일류인 재능 있는 작가는 여기에 힘을 써 옛것을 녹여 새로움을 만들어 내어야 비로소 독창적이고 후세에 모범이 될만한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대련(對聯) 문학을 샘플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짧고 간단함에 국한된 속성을 가졌지만 증국번(曾國藩)의 손에 이르러서는 응대, 서술, 감정표현, 비평...에 능히 쓰여 자유자재로 구사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앞으로 협패의 주제의식의 역할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표현형식과 수법과 반드시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원래 저속함이 없지 않았던 탐정 플롯이 환골탈태하여 깊고, 참신하고 과학적인 추리소설이 된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렇다, 우리들은 협패가 다시 살아날 시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포부를 가진 일류고수가 강호에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섭, 임 두 분이 힘을 쏟는 연구와 평론의 여정(旅程)이 홀로 걷는 길에서 점차 앞뒤로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심혈을 쏟아 얻은 심득(心得)이 무협안내의 탄탄대로가 되어 신예들로 하여금 이를 모방하여 매가 높이 날아오르듯 문명(文名)을 멀리 떨치기를!

이로써 서문으로 삼는다.
 2005년 3월 18일 타이뻬이(臺北)에서

2. 섭·임의 쌍검합벽
   보순(保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에서 그가 알고 있던 연구생 한명을 테스트하기 위해 초청받아 가서였다. 3층에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나는 원래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철괴리(鐵拐李)가 3층에 올라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어 매우 미안해하였으나 그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가 담강대학(淡江大學)에 무협소설연구실을 만든 것을 진귀한 일로 생각했으나, 그의 논저를 읽은 후에는 더욱 괄목상대(刮目相對) 하게 되었다. 그의 꾸준한 연구가 이미 성취를 이룬 것에 경의를 표하며 더욱이 그가 독창적인 것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다시 살려내듯이 대만협패를 다시 살려낼 희망에 공헌한 점인데, 그의 일반적인 그것과는 다른 겸허함에 감명을 받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로 하여금 현재 학술계의 중견학자에 대하여 다시 신뢰를 갖도록 하였다.

보순을 통해 “남천일엽(南天一葉) 홍생(洪生) 형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는 다재다능한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일찍이 그가 만든 경극(京劇)CD는 나로 하여금 몇 번이고 다시 듣도록 만들었으며 처량하고 격앙된 노래 가락 가운데서 홍생의 재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줄곧 문학비평에서 중점은“재창조”가 요구되는지 유무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비평자가 자기의견을 갖지 않으면 단지 “환원(還原)”이거나 “부회뇌동”에 불과하여 무슨 논할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홍생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의 <천하제일기서(天下第一奇書)-촉산검협전(蜀山劍俠傳) 비밀탐색>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게 한겹 한겹 조개껍질을 벗겨내듯이 문장의 주제를 매우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비단 홍생의 평론 솜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가 문헌에 정통하여 이를 융합한 후에 훌륭하게 스스로 얻어낸 것이다.

<대만무협소설발전사>는 섭·임 쌍검의 공동저술로 완성되었고 제재(題材)를 상세하고 완전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읽기에 막힘이 없어 검색과 연구의 필요에 족히 공헌할 만하며 더욱 큰 가치는 각 명가에 대한 분석에 있다. 평론가의 재창조를 통하여 史傳(역사서와 경전)처럼 광휘(光輝)가 환히 빛나, 살아 있거나 세상을 떠난 각 명가를 능히 위로할 수 있으며, 또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상과 분석의 바탕을 제공하며 더욱이 오랫동안 침체된 협패의 세상을 안내하는 밝은 등불이 될 것이다. 

楊昌年(기록자 주 : 즉 獨抱樓主)
  
1. 우선, 고금(古今)의 협패(俠稗)를 말한다.

협패(俠稗)를 애독하는 건 일찍이 태사공(太史公)의 유협열전(遊俠列傳) 가운데 주가(朱家), 곽해(郭解)가 홀로 우뚝 서 자신의 생각을 실행하는, 호방한 기운이 드높은 이미지에서 이미 볼 수 있다. 당대(唐代)에 이르러 이백(李白)의 협객행(俠客行)에서
“조나라 무사는 거친 갓끈을 늘어뜨렸고 오구검은 서릿발처럼 빛나네((趙客縵胡纓,吳鉤霜雪明).
은빛 안장에 빛나는 백마, 유성처럼 날래고(良鞍照白馬,颯遝如流星),
열 걸음에 한 사람을 죽여도 천리에 자취를 남기지 않는구나(十步殺一人,千里不留行).
일을 마치면 옷을 털고 떠나 그 몸과 이름을 깊이 감추네...“(事了拂衣去,深藏身與名…)
라고 그려낸 것처럼 천리 길을 외로이 가는 한 마리 말과 한 자루 검은 사람들로 하여금 얼마나 동경하게 하는가!
 
정의를 받들어 간사한 자를 제거하는 기풍이 후세에 전하여 울리니 당연히 “비록 죽는다 해도 의로운 기개 향기로우니 세상의 영웅들에게 부끄럽지 않다네(縱死俠骨香,不慚世上英)”라는 것이고 이백이 동무음(東武吟)에서 “재주는 아직도 의지할만하여 세상의 영웅호걸에 부끄럽지 않도다(才力猶可倚,不慚世上雄) 라고 한 것은 재기 넘치는 사람의 의기(意氣)가 솟아 나온 것이다.
 
전기(傳奇)에 이르러, 홍선전(紅線傳, 袁郊, 약 827-873년)- 중에서 “위성(魏城)의 서문을 나서서, 2백리 길을 오는데 높이 솟은 동작대(銅雀臺)가 보이고 장수(漳水)는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새벽닭 울음이 들리고 기울어진 달은 수풀에 걸려 있었지요. 분한 마음으로 갔다가 기쁜 마음으로 돌아오니 문득 행역(行役)의 고통도 잊었습니다. 알아봐 주시는데 대하여 감사하여 기대하는 바에 부응하였습니다.”라는 시화(詩化)된 우아함을 거쳐
“채릉가(採菱歌) 노랫소리 재촉하는 목란주(木蘭舟)를 원망하고(采菱歌怨木蘭舟)
백척고루(百尺高樓)의 송별연 열어도 보내는 마음엔 낙담뿐이네(送客魂消百尺樓).
(홍선은) 낙수(洛水)의 여신처럼 안개 속으로 떠나고(還似洛妃乘霧去)
푸른 하늘 끝이 없고 강물만 홀로 헛되이 흐르는구나(碧天無際水空流).“
라는 결말까지 뻗어 나간다. 정취가 완곡하고 함축적이어서 협자(俠者)의 본질이 바로 지성지정(至性至情)의 걸출한 인물임을 설명하였다.

 현대에 이르러 일찍이 환주루주(李壽民, 1902-1961)의 촉산검협전(蜀山剑侠传)을 읽었을 때의 감각은 “다 읽을 수 없다”(너무 훌륭하고, 너무 정교하고 아름다워 대충 훑어보고 말 수 없었다)였다. 작가 상상력의 풍부함이 족히 사람을 놀랠만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인류 두뇌의 복잡함이 과연 이와 같을 수 있을까? 라고 의심을 금치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한 새로움과 기발함은 마치 노잔유기(老殘遊記) 가운데 왕소옥(王小玉)이 부르는 희세의 절창(絶唱)과 같아 어떤 사람이 후대의 무협소설 중의 상상 설정은 모두 촉산검협전으로 귀착한다고 한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후에 일본인 미시마유키오(三島由紀夫, 1926-1970)의 금각사(金閣寺)를 읽었을 때와 비교하면 그의 깊고 치밀함이 이와 같아서 내 능력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느낀 점에서 비슷하였다.
 
문예창작 공모에 있어서 이것을 돌보다 저것을 놓치거나(顧此失彼) 구슬 상자는 사고 주옥은 되돌려 주는(買櫝還珠) 식의 폐단은 곧 소설 정신의 정화(精華)인 이념의식이 어쩌면 눈부시게 화려한 피와 살의 풍모 아래에 가려진 데에 귀결한다. 그러나 환주루주의 의식의 구슬은 여전히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와 그의 빛나는 현명함으로 분명하게 성찰을 이끌고 있기 때문에 작가의 솜씨에 탄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구나!

 최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서양의 “판타지리얼리즘”기법-일종의 리얼리즘의 성격 변화-은 순리얼리즘에 비해 더욱 세인(世人)의 마음속 표현 부족을 보완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속국(屬國)에서 대국(大國)이 되는 새로운 형태는 만약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물의 한쪽에 있는 것은 환주루주와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효과를 내는 것(異曲同工)이 아니겠는가?
 
그 다음에 15부 36책의 거작으로 무림을 웅패(雄霸)한 김용(查良鏞, 1924-)은 “협의(俠義)”와 역사(歷史)를 조합하여 웅대한 집을 이룬 중요한 작가이다. 영호충, 교봉, 황용 같은 중요 인물들은 독자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아 놀라 흠모하고 감탄하여 오래도록 빛이 바래지 않는다. 아쉬운 것은 큰 명성을 얻은 후에 계속 이어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진실로 그의 개작에 찬성하지 않는다). 고봉(高峰) 위의 정체와 하강은 과연 숙명이란 말인가! 그러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 1928-)를 보면 분명히 그렇지 않다. 필자는 단지 작가의 재능이 여전히 있기만 하면 그 높은 봉우리 위의 병목을 여전히 돌파하여 길을 바꿀 가능성이 있다고 깊이 믿고 있다.
 
왕도려(王葆祥,1909-1977) 보다 더 나로 하여금 흠모토록 하는 작가는 없다. 30여년 전 타이중(臺中)에서 “사람의 근심(人之患)”학회의 한 친구가 왕씨의 협패 시리즈는 응당 경전적인 작품(經典之作)의 지위에 들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확실히 그렇다! 필자는 그가 상상으로 만들어낸 기괴한 무공이 전혀 없이, 다만 용기와 기법에만 의지하고, 구사하는 한 자루 검만을 모은 것이 매우 마음에 드는데, 이러한 것들이 보다 삶에 가까울 수 있고 신뢰도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왕씨의 작품이 감동적이고 매혹적인 까닭은 또 그의 소설의 분위기가 일종의 강호유랑(浪迹江湖), 고달픔과 시정(市井)에서의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 감성적인 이어쓰기로 언제나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데 있다.

학경곤륜(鶴驚昆侖)부터 철기은병(鐵騎銀瓶)까지 거침없이 써내려간 5부작 비정협패(悲情俠稗)는 세상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하다. 한철방(韓鐵芳)과 춘설병(春雪瓶)의 결혼에서 응당 끝이 났어야 하는데 유수련(俞秀蓮)을 보충 설명하는 부분은 분명히 군더더기이고, 문장이 가지런하지 않아 개 꼬리를 담비 꼬리에 잇듯(狗尾續貂), 다른 사람이 이어서 썼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평론된 “20세기소설 100강(强)”가운데 뜻밖에도 왕공이 누락되었는데 이에 대해 필자는 매우 불만스럽다. 하지만 그의 소설에서 소재를 얻은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은 도리어 수상을 할 수 있었는데, 실은 왕씨 작품의 비정(悲情)의 창해(滄海)에 던져진 한 알의 좁쌀에 불과할 뿐이다. 뛰어난 작품에 비해 평가는 낮아 지금은 이름이 묻혀버렸으니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그리고 사(查), 왕(王) 이공(二公)은 소설 중 서술의 “시차(時差)에 있어서 비교할만하다. 사공(查公)의 작품에서는 인물의 전후 이미지가 같지 않아, 원래 성공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낸 인물이 그 후에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로 인해 빛이 바래는 일들이 자주 나타난다.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에서 활발하고 영리한 소녀 황용(黄蓉)은 신조협려(神雕俠侶)에 이르러서는 다른 사람의 아내, 엄마가 되어 비록 범용(凡庸)한 정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고는 해도 독자들이 원래 갖고 있던 인상과는 많은 차이가 나버렸다. 또한, 동사(東邪) 황약사(黃藥師)는 사조영웅전에서 처음 등장할 때 얼마나 거리낌 없이 시원스러웠던가? 그 후 신조협려(神雕俠侶)의 신예 양과(楊過)의 주도 하에 결국 마치 예속국처럼 몰락하고 말았다. 의천도룡기(倚天屠龙记) 가운데 청익복왕(青翼蝠王) 위일소(韋一笑)가 등장할 때는 그 기세가 사람을 놀랠만 했으나 그 후 장무기(張無忌) 교주의 이미지가 점차 견고해진 후에는 그의 부하도 다만 복익(蝠翼)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왕공의 작품을 보면, 독자가 받는 차이는 피할 수 있는 것 같다. 저 강남학(江南鶴)은 비록 주인공 자리를 넘겨 준 뒤에 출현하지만 여전히 신룡(神龍)이 그 머리만 보이고 꼬리는 드러내지 않는 것처럼 (행적이나 행동이 매우 신비스러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전 그대로의 뛰어난 기개를 보여주고 있다.

이모백(李慕白)과 유수련(俞秀蓮)은 공을 쌓은 후 조용히 떠나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는데 아쉽다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여운을 남겼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 것이고 더욱이 독자로 하여금 슬픔을 생각하게 만든다. 옥교룡(玉嬌龍)에 관해서는 그녀가 우여곡절이 많은 풍운을 겪은 후 황사(黃沙)가 끊임없이 흐르는 사막에서 친 아들이 곁에서 지키는 가운데 병으로 세상을 떠나는데 그것은 그녀가 병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합리적인 변경이라서 독자들은 슬프고 마음이 아프지만 실의(失意)의 느낌은 갖지 않는다.
 
일찍이 화북(華北)에서 이름을 날린 작가인 주정목(朱貞木)의 나찰부인(羅刹夫人), 대만에서 우뚝 솟은 사마령(司馬翎)의 관락풍운록(關洛風雲錄)과 검기천환록(劍氣千幻錄)은 모두 나에게 놀랍고 흠모하는 느낌을 주었었다. 그들이 취한 협(俠)과 정(情)의 합은 김용과 구별되는데 비록 “역사”의 견실함은 생각할 수 없지만 “정”의 부드러움은 느낄 수 있다.
 대략 1980년대 초에 나의 외국 국적 학생이 대만협패 연구에 뜻을 두었던 관계로 그를 데리고 고룡(古龍)을 만나러 갔었기 때문에 들이 붓는 것처럼 마시는 그 분 주괴(酒魁)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그의 소설은 호탕한 기백의 영향에 중점이 있다고 느꼈었다.
비록 완곡함은 쉽게 약해지고 슬퍼질 수 있으며, 호기로움은 거칠고 속되기 쉽지만 그럼에도 고룡은 호기로움과 완곡함(豪婉), 강함과 부드러움(刚柔)을 조절할 수 있었다. 그가 지은 인물 이름 풍만천(風漫天)은 능히 사람들에게 강으로 바다로 정처 없이 유랑하는 창망(苍茫)한 느낌을 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