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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무협소설발전사'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23.04.24 공저자 섭홍생
  2. 2023.04.20 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4 3
  3. 2023.04.17 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3 1
  4. 2023.04.14 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2

공저자 섭홍생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24. 08:51 Posted by 비천호리

섭홍생(葉洪生 1948~ ), 중국 안휘성(安徽省) 여강(廬江)인. 남경(南京)에서 태어난 편집자, 작가, 무협소설평론가로 대만의 담강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시보(中國時報) 대륙연구실 연구원, 주임, 해외판 편집자, 연합보 칼럼팀 부주임, 대륙연구실 주임, 부총편집장, 주필, 그리고 역사월간지 부총편집장 등을 지냈다.

아버지는 전 공군 총정전부(總政戰部) 부주임 집행관 엽일범(葉逸凡) 소장(少將), 차남으로 어려서부터 경극을 매우 좋아해서 양파(楊派)의 노생(老生)을 배웠고, 대학 시절에는 학교 간 공연인 <실공참 失空斬>, <장상화 將相和>, <이진궁 二進宮> 등의 유명한 연극공연에 참여하였다. 1990년대 중반 중국광동공사(中國廣東公司)의 국극(國劇) 프로그램 인터뷰와 노생 소가곡(小歌曲) 녹음을 방송한 바 있으며, 양안의 국극 문화 교류에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역주) 양파 : 경극의 노생 유파-양보삼이 창립
노생 : 경극(京劇)에서 재상·충신·학자 따위의 중년 이상 남자로 분장하는 배우

저서

[산문/잡문]
- 20년 만에 꾸는 봄꿈(二十年一覺飄花夢, 環宇版, 1972)
- 이 세대의 방향(這一代的方向, 환우판, 1972)
- 번화 속에 신검을 묻다(綺羅堆裏埋神劍, 天下圖書版, 1975)
- 내일의 중국을 위한 길 찾기(爲明日中國探路, 黎明版, 1976)

[소설]
-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逼上梁山, 民生報版, 1981)

[무협 리뷰]
- 촉산검협평전(蜀山劍俠評傳, 遠景版,1982)
- 무협소설 담예록-섭홍생 논검(武俠小說談藝錄--葉洪生論劍, 聯經版, 1994)
- 천하제일 기서 - 촉산검협전 비밀탐구(天下第一奇書--蜀山劍俠傳探秘, 上海學林版, 2002)
- 대만 무협소설 발전사(台灣武俠小說發展史, 遠流版, 2005)

[편집]
-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成文版, 1979)
- 풍뢰 같은 힘만이 중국에 생기를 부여할 수 있다(九州生氣恃風雷, 成文版, 1979)
- 백화의 쓰라린 사랑의 세계(白樺的苦戀世界, 采風版, 1982)
- 근대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계(近代中國武俠小說名著大系, 7家25種, 聯經版, 1984)
- 대만무협소설 9대문파 대표작, 아홉 작가의 9부 소설(台灣武俠小說九大門派代表作, 9家9種, 江蘇文藝版, 1995)

[참고자료]
● 섭홍생·임보순, 대만무협소설발전사, 원류출판사

● 1974년 필명 '소오루주(笑傲樓主)'로 '대만문예월간'에 <신칠협오의>, (무협장편 연재, 미완) 발표

●1976년 <하조잡지> 창간호에 <무림협은기>를 발표하여 구파 무협소설 유명작가의 명작을 소개

●1977년 <유적잡지>에 <금의 한벌 40년의 봄> 발표(무협 중편)

● 1982~1984년 연경출판사(聯經出版公司)의 의뢰를 받아 <근대 중국 무협소설 명작 대계> 의 편집/평점(評點)/비교(批校)를 맡아 '대만 출판물 통제방법' 및 대만성경비총사령부의 '폭우 전문사건' 금지령을 과감히 돌파해 해협 양안의 분리통치 이후 처음으로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대량의 금서를 뒤집는 성공 모델이 됐다. 그 후 중국 본토에서 '무협 열풍'이 일어났고, 많은 출판사들이 '민국무협대계'에서 제재를 얻어 오래된 책을 다시 인쇄하는 등 그 영향이 매우 컸다.

● 1987년 홍콩중문대학(中文大學)이 주최, 초청한 '제1회 국제무협소설 심포지엄' 에서 '환주루주 소설의 경이로움과 생명철학을 논하다'는 논문을 낭독했다.

● 1988년 대남 성공대학교 문학대학(台南成功大學文學院) 일반교육강좌와 행정원 뉴스국 대륙출판심사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었다.

● 1989년 홍콩중문대 중국문학연구소 편집장의 '무협소설 논권'(세미나 논문집)에 초청돼 '중국 무협소설 총론'을 써내 권두에 올렸다.

● 1991년 '대만 통속소설 심포지엄'에서 '당대 무협소설의 '성인동화' 세계를 논하다 - 40년간 대만 무협창작의 발전과 변천의 투시'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대만의 '8대 서계', '4대 유파'와 관련된 새로운 관점을 선도적으로 제시했다. 이 논문은 인터넷에서 널리 퍼져 대륙의 뜻있는 인사들이 대만의 무협소설 창작 생태를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 1992년 담강대가 주최한 '협과 중국 문화(俠與中國文化)' 국제 심포지엄에 초청돼 '사마령소설 예술론'을 발표했다.

● 1993년 상해(上海)대 문과대학 겸임교수로 일하며 남경(南京)대에 초청돼 대만 무협소설 유파를 강의했다.

●1995년 북경대 중문학과에 초청돼 무협소설의 '구파'와 '신파'를 강의했다.

● 1997년 중앙연구원 문학철학연구소가 주최한 '문예이론과 대중문화' 학술심포지엄에 초청돼 '비교 홍콩·대만 무협소설의 미학-양우생과 와룡생을 예로 들다'를 발표했다.

● 1998년 4월 미국 콜로라도대학에서 열린 '김용소설과 20세기 중국문학' 심포지엄에 초청돼 '김용소설의 미학과 그 무협인물의 원형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5월에는 담강대 중문학과, 동오대 중문학과, 한학연구센터가 공동으로 개최한 중국 무협소설 국제학술심포지엄에 참가해 '무협소설 창작론 초기탐구'를 발표했다. 연말에 갑자기 심장병이 발생하여 조기 퇴직했다.

● 2005년 '대만 무협소설 발전사'를 완성한 뒤 오랜 세월 간직한 무협소설 원간본 380종을 담강대학 중문학과에 기증하고 담강대는 '무협태사공(武俠太史公)' 은방패를 수여해 표창했다.

● 같은 해 제1회 '온세인(溫世仁) 백만무협대상전' 결심위원장을 맡았다.

● 2007년 제3회 '온세인 백만 무협대상' 결심위원장을 맡았다.

● 2009년 5월 [진문논검(津門論劍)] 심포지엄에 초청돼 '북파 5대가(北派五家)의 홍콩과 대만 6대가(家)에 대한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8월에는 2009 합동 순회문예캠프에 초청돼 [무협소설 인물론]을 강의했다.

● 2010년 11월 제6회 '온세인 백만무협대상' 결심회장을 맡았다.

● 2012년 3월 성도(成都) 제1회 무협문화제에 참가해 중국무협학회로부터 제2회 봉황배 무협문학학술상을 받았다.공식적으로 '봉검귀은(封劍歸隱)'을 선포하고 무림에서 물러났다.

● 2009년 5월 [진문논검津門論劍)] 심포지엄에 초청돼 '북파 5대가(北派五家)의 홍콩과 대만 6대가(家)에 대한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8월에는 2009 합동 순회문예캠프에 초청돼 [무협소설 인물론]을 강의했다.

● 2010년 11월 제6회 '온세인 백만무협대상' 결심회장을 맡았다.

●2012년 3월 성도(成都) 제1회 무협문화제에 참가해 중국무협학회로부터 제2회 봉황배 무협문학학술상을 받았다.공식적으로 '봉검귀은(封剑归隐)'을 선포하고 무림에서 물러났다.

출처 : 百度百科 발췌 https://baike.baidu.hk/item/%E8%91%89%E6%B4%AA%E7%94%9F/1453906

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4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20. 18:18 Posted by 비천호리

본서(本書)를 공저(共著)하게 된 전말 및 설명에 관하여

붓을 달려 여기까지 왔으니, 이 기록의 역사에 대해 몇 마디 속마음을 털어놓겠다. 이 책이 온갖 고난을 헤치고 '착수'될 수 있었던 건 뜻을 같이하는 절친한 사이인 임보순 교수의 열성과 독촉 덕분으로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대략 1994년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저런 횡포하고 억지스러운 일을 당했기 때문에 홀연 물러날 마음이 싹텄다. 그 때문에 몇 년을 허송세월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

1998년 5월 말, 보순이 나를 초청하여 미국을 방문해 콜로라도 대학이 주최한 '김용 소설과 20세기 중국 문학' 국제 학술 심포지엄에 함께 참가했다. 회의 참석자는 대륙 작가가 많았고 진정한 전문가와 학자는 비교적 적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줄곧  김용을 추켜세워 거의 '성스러운 교주님'에 대한  경배라 할 만큼 낯 간지러운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 대만 무협작가의 제반 업적에 대해서는 본체만체하고 모조리 말살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만의 무협 작가들은 모두 김용을 스승으로 삼아 그대로 모방하고 있으며, 감상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함부로 지껄이기까지 하였다. 우리는 당시 회의에서 비록 이치에 따라 힘써 다퉜지만 결국은 중과부적이었고, 역사적 사실이 심각하게 왜곡되는 것을 깊이 우려했다.

나중에 보순은 나에게 "우리가 시시비비를 다퉈봤자 헛수고다. 차라리 함께 대만 무협소설사를 써서 이 사실들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고 귀중한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것이 어떠냐"고 상의했다. 확실히 그가 신중히 '정확한 기록의 역사'를 함께 쓰자는 제의를 한 것은 일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무협소설은 다른 대중적인 읽을거리와 달리 매 한 부의 작품 분량이 걸핏하면 수십, 수백만자에 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릇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은 모두 다작으로 유명해서 작가 별로 적어도 10 몇부에서 20부, 많으면 70~80부의 작품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를 연구하려면 산 같은 문서와 바다 같은 글자(書山字海),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 할 정도로 많은 책을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오랫동안의 열독(閱讀)으로 쌓아온 심득(心得)이 없다면 황당무계한 일이었다. 더욱이 모래 밭을 헤집어 금을 줍듯 쓸 만한 사료를 선별하는 데는 도처에서 시간과 정력을 필요로 한다. 누군가 단창필마(單槍匹馬)로 무림에 뛰어드는 망상을 한다면 절대로 성공하기 어렵지만, 두 사람이 분업해 협력하고 공동 집필하는 것은 오히려 실현 가능한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의 성질이 중요하고 관련성이 광범위하여 전반적인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로 착수하지 않았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얼마 후 내가 큰 병을 앓아 죽을 고비를 겪다 겨우 살아나게 될 줄을. 보순은 나보다 일곱 살 아래였고, "강호를 걸은" 경력은 비교적 짧았다. 그는 내가 50의 나이에 또 불의의 일이 생기면 혼자서는 어렵고 무거운 짐을 맡을 수 없을 것을 두려워했는데 왜냐하면 나 같이 어려서부터 무협을 보고 자랐고, 나이가 들어서도 후회하지 않는 "괴짜"를 다른 데서 찾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이 나은  후, 나는 그의 끈질긴 설득을 견디지 못하고 단번에 승낙하였고, 곧바로 충분한 토론을 전개하여 대강의 중요 항목과 분업 사항을 작성하여 저술에 필요한 조치를 진행하였다.

이 책은 밀레니엄의 여름부터 쓰기 시작하여, 전후 다섯 번의 봄 가을에 걸쳐 세차례 원고를 바꾸어 번잡한 것은 덜어내고 요점을 추려내어 비로소 완성하였다. 보순이 겸양과 신임으로 나를 전서의 원고를 조율한 사람(通稿人)으로 추천했다. 본서의 컨텐츠 기획, 취사선택 기준, 분업 협력 등의 항목에 대해 책임이 있고 의무도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필요한 설명을 한다. 이제 그 가운데 뚜렷히 큰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1) 콘텐츠 기획 방면
이 책은 <서론緒論>을 선두로 하여 무협소설과 통속문학, 사회대중, 학술연구 등 각 방면의 상호작용 관계와 그 존재의 현실적 의의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전서는 총 4장 19절로 나뉘며, 각 장의 세부 항목은 하나의 역사 발전시기에 나타난 주체적인 정신의 면모를 상징한다. 시간의 범위는 1951년부터 2001년까지(운중악이 마지막으로 절필한 때를 한도로 함), 대개 반세기 동안 대만 무협소설의 흥망성쇠의 시말, 크고 작은 사건들이 모두 여기에 들어있다.

본서는 작가의 작품/출판 유통의 두 선(雙線)이 교차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으며, 단계를 나누어 종합적인 논술을 진행하고 있다. 유명 작가의 생애와 학습경력에 대해서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검증하여 신뢰할 수 있고 근거가 있도록 하는데 힘썼고, 무릇 대표적(동료 또는 독자에 대해 광범위한 영향력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인 작가의 작품은 특별주제로 처리하여 중시함을 표현했다.

책 전체의 기조는 대만 무협이 창작한 내용과 형식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의 발전 과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제1장의 발흥기와 제2장의 흥성기를 논술의 중심으로 하고, 편폭도 비교적 큰데 20년 동안 백화제방의 번영 상황에 착안하였다. 제3장 퇴조기는 대만 무협 창작이 직면한 내외협살(內外夾殺)의 곤경을 개괄적으로 서술하고, 제4장 쇠미기는 대만에서 대륙으로 확대하며 열도 내 무협 출판업자와 창작자가 '제2의 봄'을 찾으려는 시비와 공과를 논하고, 오늘날 무협 연구의 현 주소에 걸치는 등 여러가지를 논하고 있다.

(2) 취사선택의 기준 방면
실용적 태도로 먼저 주요 작가 10인의 작품을 주요 논술 대상으로 선정하여 노(老), 중(中), 청(青) 3대의 노력과 성과를 대표한다. 이 중 낭홍완은 대만 무협창작의 선구자이며, 최초의 전문작가로서 신문, 잡지 등의 간행물 연재 바람을 일으켰고, 와룡생, 사마령, 제갈청운, 고룡의 4대가는 1960년대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각자 문학을 이끌었으며 지극히 높은 영예를 누렸다.

육어와 진홍은 대만현지 출신 작가 중 뛰어난 사람이며, 각각 '신파 무협'에 획기적인 진전을 이룬 공을 세웠으며, 다른 유명 작가들이 대체할 수 없다. 운중악과 유잔양은 서로 다른 ’강호 사실(寫實, 리얼리즘)파‘ 스타일을 취하여 상호 대비되며 결점과 뛰어난 점이 모두 있다.  특히 전자가 역사를 원용하여 이야기를 서술하고 고대의 제도와 문물 및 풍속과 민정(民情)을 재현한 것은 격찬을 받을 만하다. 온서안은 뒤늦게 출도했지만 무협 퇴조기의 막차를 탔고 ’초신파(超新派)/현대파‘ 수법으로 무협 문체의 형식을 뒤집어 독특한 하나의 풍격을 갖췄다.

그 다음으로, ’8대 서계(八大書系)’를 대만 무협 출판업의 골간으로 삼아 그 근원이 되는 작가와 작품 목록을 분별하여 간략하게 소개한다. 이는 8개 출판사는 남기(南琪)를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대만의 일류 무협 작가(상대적 기준으로)를 양성하여 많은 책을 냈기 때문이다. 남기는 1970년대에 다수의 유명 작가들을 망라하여 원고 제공자로 삼아 마치 천겹의 파도를 몰아가는 듯한 기세였으니 그 영향 또한 가볍게 볼 수 없다.

거듭 말하지만, 이 책은 사람의 마음에 해를 끼치는 ‘귀파(鬼派)’와 ‘색정파(色情派)’의 작품을 '반면교사의 교재'로 삼아 논술의 대상에 끼워 넣었다. 그 극악함이 ‘독초‘ 와 같기 때문에 반드시 힘써 비판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어야 한다.

(3) 분업 협력 방면
나와 보순은 서로 협력하여 정확한 역사 서술을 최고 원칙으로 삼아 본서를 쓰기로 하고, 개인의 흥미와 전문성에 따라 서로 '책임지고' 관련 장절(章節)을 나누어 쓰되,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토론을 제의하여 해결방법을 찾기로 했다. 우리의 분업 상황은 대략 다음과 같다.

보순은 대학파(大學派) 입장에서 <서론>과 <결론>을, 나는 원고 제1장과 제2장(대부분)의 원고를 맡고 중간 3, 4장은 두 사람이 자유롭게 절을 골라 각각 손을 댄 후 조정하여 일치시켰다. 좋은 점은 집필자가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피하며 마음껏 발휘하고 각자 정력을 집중하여 집필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두 사람의 문체 스타일과 사상적 인식이 완전히 통일되기 어렵고 많은 저촉이 생길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본분을 넘어서'  관련된 사람과 일에 대해 중복 서술하여 쓸데 없는 번거로움을 가중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가 원고 전체를 살피는 일을 책임지고 맡아서 사심 없고 치우치지 않는 태도로 적절하게 수정 첨삭함으로써 책 전체의 기경팔맥(奇經八脈)을 통하게 해야만 해결된다.

필자는 불민(不敏) 하지만 보순으로부터 전권을 얻어 이 관건이 되는 일을 처리한 이상, 당연히 본서 내용의 성패와 득실에 대한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 다만, 나의 문화적 소양에 한계가 있고 식견이 부족하여 열심히 일에 종사하고 전력을 다하였지만, 여전히 이상(理想)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진다.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바란다.

당나라 류지기(劉知幾)는 <사통史通>에서 일찍이 견식 있는 사람은 응당 '세가지 장점(三長)', 즉 사재(史才), 사학(史學), 사식(史識)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했고, 청나라 유학자 장학성(章學誠)은 <문사통의 文史通義>에서 다시 사덕(史德)을 더해 아울러  '네가지 장점'이라고 부르며, 고금의 좋은 역사서술(良史)인지를 가늠하는 모범으로 삼았다. 본인은 이 '네 가지 장점(四長)'에 관해 대체로 얻은 바가  없어 상당히 부끄럽지만, 오직 가슴속에 가득찬 뜨거운 피는 아직 식지 않아서 감히 무협 대중을 위한 견해를 밝힌다.

아쉽게도 나는 근세의 서양 학자인 J.H.Robinson의 "신사학(新史學)"과 같은 소위 "사심(史心)"(일체의 현대 학설을 운용하여 역사 발전 현상을 해석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의미)에 대해 비교적 전면적인 이해가 부족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한 시대의 협패(俠稗) 흥망성쇠의 역사를 침착하게 파악하여 역사의 산증인이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내외의 모든 무협 동호인들에게 진심으로 고백하고 싶다.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보순과 그의 제자들이 도처로 무협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관련 도서목록 및 신문잡지 등 간행물 연재 정보를 조사해준데 힘입어 오류를 줄일 수 있었다. 상해 주청림(周清霖) 형과 북경 고진(顧臻) 형이 때맞춰 대륙에서 출판한 대만 무협도서의 각종 "참고 정보"를 제공해 준데 대해 감사를 드린다. 많은 유익함을 얻었고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작고한 벗 우지굉 형이 생전에 얼굴을 맞대어 격려해주고 외부인들이 모르는 많은 '무림비밀'을 솔직하게 알려주고 내게 귀중한 가르침을 준데 대해 감사하여 마음에 새긴다. 그들 모두의 전폭적인 도움이 없었다면, 이 당대 유일무이한 대만 무협소설사는 모든 것을 망라하여 계획한 때에 맞춰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 모두 가버렸구나! 마음속에 우연히 당 나라 사람 이의산(李義山)의 싯구가 스쳐간다. "늘 백발로 강호(江湖)에 귀은(歸隱)하고 싶지만, 세상을 뒤바꾼 후 작은 배 타고 돌아가야지!(永憶江湖歸白發, 欲回天地弄扁舟!)". 우리는 지난 5년 동안 원고 작업으로 고군분투해왔지만, 한 마음으로 50년의 강호 옛일을 모두 이 역사 속으로 압축해 정확히 기록하려고 한 것 아니겠는가! 이제 이 큰 일의 인연을 마무리할  수 있어 무협에 뜻을 같이하는 천하의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으니, 보잘 것 없는 나의 이번 생 또한 유감이 없다.

해협(海峽) 양안(兩岸)의 덕망 높고 벗이자 스승인 노학자 서사년 선생과 양창년 선생은 바쁘신 와중에도 이 책의 서문을 보내 주시어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며, 또한, 편집 담당자 이소연 아가씨는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고, 노고와 원망을 마다하지 않아 나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었으니, 삼가 여기에서 함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본인이 여러 해 동안 수집한 '협객장서(俠客藏書)' 500여 권, 약 1만 집(集) 분량의 32/36절본 원판 무협소설도 이 책이 출간되는 날 모두 담강대학(淡江大學) 무협연구실에 기증해 후학들이 참고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내가 헛되이 보순보다 몇 살 더 먹었기 때문에, 특별히 저자를 대표하여 이 소소한 소감을 말하고, 평생의 지향(志向)과 좋아하는 바를 털어놓았다. 혹시 독자들은 "무협소설을 선택하고 그것에 고집스럽다"고 나를 비웃을지 모르겠다.

2005년 4월 남천일엽(南天一葉)이 대북(台北) 금검산방(琴劍山房)에서 적다.
 

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3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17. 19:04 Posted by 비천호리

"무협소설로 벗을 만남(以俠會友)", 그리고 나의 심미관

1994년에 출판된 <논검-論劍무협소설담예록談藝錄>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논증을 기초로 한 하나의 총결론이다. 이 책은 크게 '무협고금담(古今談)', '근대무협 명가명저선평(名家名著選評)', '당대(當代) 무협 명가명저선평'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중국 '무협문학'의 역사 연혁에 대한 종횡으로 교차하는 거시적 논술뿐만 아니라 근/당대의 개별 무협명작에 대해서도 상세한 논평과 반성이 있어 참고가치가 없지 않다. 특히 대만의 유명한 작가들은 대부분 나와 한 번쯤은 만난 인연이 있는데, 그 사람을 알고 그 작품을 논한 것은 비록 정확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거나 혹은 작가의 '창작 심경(文心)'에 더 가깝지 않을까?

1976년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놓았을 때 가장 먼저 친교를 맺게 된 무협 명가가 바로 고룡이었다. 이 분 일대의 귀재(鬼才)는 머리가 크고 몸집이 작으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해 '자리는 늘 손님으로 가득 차고 잔에 술이 비지 않는다(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고 할만했다! 그때 그는 이미 큰돈을 벌고 있어서 의기양양해서 손님을 초대할 때마다 사치스러운 자리를 마련하고, 시작하자마자 네다섯 병의 양주로 호사스러움을 나타냈다. 그 성정이 호탕해서 종종 술을 따르자마자 잔을 비우고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흥이 나서 '무협 연혁'을 신나게 이야기하면 도도히 이어져 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고룡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인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도식화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마령의 작품 광(狂)이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초기에는 사마령에게 받은 영향이 매우 컸음을 시사했다. 또한 김용과 그 자신을 제외하면 사마령이 대만에서 가장 인정할만한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듬해 나는 처음 홍콩을 방문해서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사마령(司馬翎)을 만났는데 그는 눈빛이 그윽하고 얼굴은 야위었으며, 약간의 학자풍을 띤 문사였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는 항상 사려가 깊었는데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 꺼내면 반드시 정곡을 찔렀다! 마치 그가 그려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지혜로운 무림고수처럼. 그때 그는 이미 기본적으로 무단을 떠난 상태였는데 나와 어렸을 때 어떻게 학교를 그만뒀는지, 환주루주의 <촉산 蜀山>의 세계에 온 정신이 빠져들어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고룡의 드높은 기세와 추월에 대해서는 살짝 웃기만 했는데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그도 무협소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세속에만 아첨하고 시장에 코를 꿰어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1983년 그는 내 요청으로 다시 한번 산을 나서(出山) 힘을 모아 비우천관(飛羽天關)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누가 알았겠는가, 모 신문사에 의해 중간에 잘려버려 평생의 한으로 여기게 될 줄을.

모용미는 내가 친교를 맺게 된 세 번째 무협 명가이자 오랜 친구인 당문표(唐文標) 교수가 높게 평가하는 분이다.  그 천성이 활달하고 유머러스하며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아 스스로 '연주상인(煙酒上人)'으로 호를 정했다. 그는 비록 문단의 신예 출신으로서 현대문학 기법에 익숙하기는 했지만 환주루주 이야기를 꺼내면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다. 자조(自嘲)적으로 "곱추가 씨름을 하면 머리와 발이 동시에 땅에 닿지 않는다(駝子摔跤, 兩不著地)"는 말처럼 매번 문예와 무협 창작의 두마리 토끼를 쫒다가 둘 다 놓치는 허망한 결과가 될 때마다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아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와룡생(臥龍生), 제갈청운(諸葛青雲), 고용(高庸), 진홍(秦紅), 소일(蕭逸), 유잔양(柳殘陽) 및 이용(易容) 등의 사람들과도 나는 일찍이 '논검(論劍)'의 우정을 나눈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마음은 있어도 나이가 들어 힘이 부족한' 우지굉(於志宏, 무협출판가)이 중개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중간에서 열심히 연락하지 않았다면 이 은퇴한지 오래되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노작가들이 한곳에 모두 모여 나와 함께 무를 이야기하고 협을 논(談武論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 씨는 교제 범위가 넓고 일찍이 대만 무협 창작계에서 여러 해 동안 종사하여 그들의 인생 경력과 생활 습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관련 논저에서 대만의 무협 명가와 관련된 모든 기초자료는 대부분 우 씨가 제공한 것으로 그 공이 매우 크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 년 후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이 그 생명과 함께 모두 사라져 드러나지 않고 필연코 역사에서 잊혀질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독자에게 큰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룡, 사마령, 모용미, 와룡생, 제갈청운, 고용 심지어 우지굉까지 여러 협형(俠兄)들이 모두 선후로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에 이르러 옛일을 생각하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떤 이는 "무협작가와 친구가 되는 것이 이론 저술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요한 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확실히 방해를 받지 않았다. "경중(輕重)의 판단에 사사로움이 없고, 애증(憎愛)에 따라 치우치지 않는(無私於輕重, 不偏於憎愛)" 것이 나의 일관된 이론 저술의 준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의 입장이 편파적이고 호오(好惡)의 감정에 치우친다면, 어떠한 공신력도 말할 수 없고, 더욱이 많은 독자와 전문가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이 중 중요한 부분은 본인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는 무협 심미관과 관련이 있어 한 번 서술할만한 가치가 있다.

현상에 입각하여 논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미적 판단 경험을 가지고 있다. 크게는 산천의 풍경과 문학 예술을 감상하고 작게는 새, 짐승, 벌레, 물고기, 종이, 붓, 먹, 벼루를 품평(品評)하는데,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무협소설만 놓고 보면 선인(先人)들이 쓴 무협 작품을 읽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주관적인 인상과 느낌을 형성함으로써 이를 통해 선악과 미추(美醜)를 인식하는 하나의 체득과정이다. 심미 경험이 풍부한지 여부는 무협 작가와 독자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심미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문화적 수양 조건을 배합하면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독자는 끊임없이 심미 경험을 축적하여 견문이 넓어지면 점차 인지, 감상 능력을 향상시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다만 무협 평론가와 일반 독자의 오락 취향은 또 다르다. 그는 반드시 그 심미 경험을 총괄하고 그 속에서 몇 가지 무협 미학의 법칙을 귀납(歸納)하여 그것을 근거로 작가 작품의 우열과 득실을 판정해야 한다. 내가 줄곧 견지해온 무협 심미관에 따라 말하자면 중요시하는 것은 문필, 잡학, 정취, 개척성의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지는 셋이다.
첫째, 문장이 매끄러워야 함은 기본 요구사항이며, 나아가 문장의 세련됨과 홀연 긴장시켰다가 이완해주는 필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대만의 일반 무협 작가는 기껏해야 위에서 서술한 '기본 요구사항'에만 부합하고, 문장이 세련된 사람은 이미 거의 없다. '정취'를 조성하거나 무예 연마나 감정묘사에 관해 말하면 명수(名手)는 우연히 얻는 '신품(神品)'이라 어쩌다 만날 수 있을뿐 더욱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잘나가는 홍콩 작가 황이(黃易) 같은 이도 기본기가 부족하여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매번 실수가 많다.  '세련' 두 글자와는 여전히 거리가 먼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둘째, 잡학은 작가가 가진 학문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고, 시사가부(詩詞)歌賦), 금기서화(琴棋書畫)에서 의복성상(醫卜星象),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이 많을수록 좋다! 이것들은 ‘기정(奇情)‘ 위주의 무협소설이 극히 흡인력을 갖는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 작가 중 유일하게 사마령만이 '전 분야에 능통'했고, 제갈청운‧모용미 등은 단지 각자 자신의 관점만 견지했을 뿐이다.

셋째, 개척성은 일반적인 소위 "창의성"과 같지 않다. 비록 둘 다 심미적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개척성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뜻을 두고 선인의 틀에서 벗어나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들을 뛰어넘고 나아가 스스로 고인(古人)의 선구적인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창의성이 단지 쓸모없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창조하거나 선인의 작품을 차용하여 작품에 쓰거나 혹은 새로운 구상이나 모양새를 만들어 내는 것과는 같지 않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대만의 무협작가 중 뛰어난 사람은 대부분 창의성이 풍부하며 예를 들어 상관정, 모용미, 운중악, 소일, 진홍, 고용 등이 모두 그러했는데 독창적인 인물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능히 한 시대의 무협 신풍(新風)을 개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앞에 와룡생, 가운데 사마령, 뒤에 고룡 단지 이 세 명에 불과하다.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무협 심미원칙은 필자가 여러 해 동안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다"라는, 신체의 감각을 통해 객관적인 존재를 인식하는 인생의 세 경지를 거친 후에 귀납적으로 도출해낸 조그마한 깨달음이며, 그 사이에 한때 "산을 보면 산이 아니고, 물을 보면 물이 아니다!"고 잘못 판단하여 내 발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결국은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다'라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안목과 식견이 크게 달라져서 1998년 졸작 <무협소설 창작론 최초탐구(初探)>와 <김용소설 미학과 그 무협인물의 원형을 논하다>에서 비교적 깊이 있게 논했다. 여기에서는 나의 담무논협(談武論俠)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만 간략히 제시하였을 뿐, 무슨 ’털을 불어 헤쳐서 결점을 찾는다(吹毛求疵)'거나‘ ’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劫富濟貧)‘ 같은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식이 깊은 군자들께서 살펴봐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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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2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14. 18:37 Posted by 비천호리

그렇기는 해도, 세월이 쌓이고 광범위하게 섭렵한 까닭에 '무학'에 대한 조예가 점차 깊어져 나서서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일찍이 초청에 응하여 <소오루주 笑傲樓主>라는 필명으로 <문예월간>에 <신칠협오의 新七俠五義>(무협장편 연재, 미완, 1974), <유적잡지 唯迪雜志>에 <금의 한벌 40년一襲錦衣四十春>(무협중편, 1977)을 집필하기도 하여 무협 창작의 문필기교, 초식동작, 인물묘사, 장면설계 및 사상적 함축 등에 대해 모두 직접 경험하여 낯설지 않았으며, 어떤 무협 작품의 우열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또한 나는 역사학과 출신의 '지식청년'이었기 때문에 줄곧 농후한 역사벽(歷史癖)을 드러내 근현대 무협작가의 심미(審美) 경험과 문화사상의 전승에 매우 중점을 두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알게 모르게 나의 무협평론에 의도치 않게 반영되었다.  <무림협은기 武林俠隱記>(<하조잡지 夏潮雜志> 창간호, 1976>, <무협소설종횡담 武俠小說縱橫談>(<민생보民生報>,1982), <여담 일갑자 이래의 무협소설閑話一甲子以來的武俠小說>(<명보월간 明報月刊>. 1983) 등이 모두 그랬다. 그러나 그동안의 작업은 대부분 '구파' 명가의 명작을 논술 대상으로 하였으며, 대부분 소개에 치중하여 독자들이 단서로 삼아 찾아내고(按圖索驥) 옛 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알 수 있도록(溫故知新) 한 것이었다. 이 시기에 '무협 고지(故紙) 더미'에 파묻혀 얻은 심득(心得)은 1984년 연경판(聯經版) '근대 중국 무협소설 명저(名著大系) '의 비교본(批校本)에 실린  '마검 10월 시금석(磨劍十月試金石)'으로 귀결된다. 그 후에도 여전히 약간의 자질구레한 저작은 있지만 대부분 재미삼아 쓴 글이라  거론할 만한 것이 없다.

옛날 남조(南朝)의 일대(一代) 大평론가 유협(劉勰)은 <문심조룡文心雕龍‧지음知音>에서 "무릇 천 곡의 좋은 곡을 연주해 봐야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천 자루의 검을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검을 알아볼 수 있다. 따라서 문학작품을 포괄적이고 객관적으로 감상하고 평가하는 방법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凡操千曲而後曉聲, 觀千劍而後識器. 故圓照之象, 務先博觀... 경중(輕重)의 판단에 사사로움이 없고, 애증(憎愛)에 따라 치우치지 않은 후에야 저울과 같이 공평하고 거울과 같이 명백해질 수 있다(無私於輕重, 不偏於憎愛, 然後能平理若衡,照辭如鏡矣)."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반평생을 강호를 떠돌며 무협의 작은 길에 침음(浸淫) 하는데 있어서의 이상적인 목표이다.

구파 여러 대가의 작품에 대해 나는 비록 시간과 공간의 환경에 제한되어 전모(全貌)를 들여다보지 못해 잃어버려서는 안 될 진주를 잃어버렸을 때의 아쉬움(遺珠之憾)을 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시대 최고의 성적표(섭홍생이 비평한 중국 무협소설대계 의 명가 7인의 25종 작품에 대한 가이드를 가리킴)를 낸 셈이다. 지난날을 거울 삼아 앞날을 알 수 있다(鑒往知來)는 말처럼 앞으로 본토로 돌아가 대만 무협 작가들의 불후의 작품을 재정비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그러나 구서(舊書)에 관한 자료가 불완전한 '오랜 문제' 문제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어서, 이는 나의 흥취를 식게 하고 곤경에 빠뜨렸다. 참을성 있게 기회가 무르익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서점의 "협패사료(侠稗史料)"를 통째로 사들이다.
1991년은 한 전환점이었다. 그해 여름, 나와 첫 만남에서부터 의기투합한 동호인 임보순(林保淳) 교수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잘 아는 대여점이 곧 영업을 종료할 것이라면서, 2만원元의 초저가에 모든 구판 무협서(총 700여부, 약 15,000집)를 기꺼이 양도하려는 중인데, 함께 돈을 내어 사서 중요한 임무를 완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는 대만 신구판(25절본開本/36절본) 무협소설 교체시기(1977-1981)로부터 이미 10년이 넘었고, 구판형을 새판형으로 교체할 소설점은 모두 일찌감치 바꾸었고, 바꾸기를 원치 않은 오래된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고 영업을 그만두었다. 판형을 바꾸지 않고도 문닫지 않을 수 있는 대여점은 마치 봉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드물었으니, 그 가게 주인은 참으로 옛것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그가 곧 국외로 이민을 가고 또 값어치를 아는 사람에게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었다면, 이 잘 보존된 '골동품'들을 쉽게 내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바란다고 해서 얻어질 수 없는 매우 좋은 일이었다! 그야말로 '예전에는 쇠 신발이 닳도록 돌아다녀도 찾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힘 한 푼 들이지 않고 찾아질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 곧바로 보순과 최종적인 결정을 하고, 즉시 가게에 알려서 조사‧정리를 했다. 그때 마침 천진(天津)의 미학자 장공생(張贛生) 형이 대만을 방문했는데, 소식을 듣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힘을 보태고자 했다. 그래서 그와 함께 대형 트럭 두 대를 빌려 그 수백 부의 무협 구서(舊書)를 힘을 합쳐 트럭에 올려 가득 싣고 돌아왔다. 보수적인 추정에 따르면, 이 "골동품"들은 대만의 모든 구판 무협 서적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며, 거기에 우리가 수년에 걸쳐 수집한 각종 명가의 작품들을 더하면 이미 상당히 완비되어 연구에 필요한 정도로는 충분했다. 이때부터 '협객장서(俠客藏書)'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고, 역사를 다루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여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나는 처음으로 이 원시 자료를 활용하여 '대만 통속소설 세미나'에서 '당대(當代) 무협소설의 '성인 동화' 세계를 논하다-40년 동안 대만 무협 창작의 발전과 변천에 대한 투시'라는 글을 발표했다. 엄격한 학술적 관점으로 보면, 이 논술은 약간 간략하고 내용이 보충되어야 하지만, 다만 필자는 격식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방법으로 대만의 '8대 서계(書系)'와 '4대 유파(流派)'에 관한 새로운 논점을 선도적으로 제시했고, 몇몇 유명 작가의 출신과 창작 취향, 나아가 '신파 무협'의 흥망성쇠 현상에 대해 상세히 분석했는데 모두 '한걸음 앞장서는' 행동이었다.
이런 까닭에 참석한 학자들로부터 널리 중시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륙의 인터넷망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원간본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드러내준 것이다! 만약 수중에 인용의 근거가 될 만한 구판 서적 없이 잘못된 것을 퍼뜨려서 갈수록 잘못 전해지도록 하며, 분석판별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자신도 믿지 않는 것으로 남을 속이는 것인데 그래서야 얼마나 가겠는가! 더구나 무감각한 사람을 깨우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와 동시에 나는 유소명(劉紹銘) 교수의 초청을 받아 <무협소설논권論卷>(제1회 국제무협소설심포지엄 논문집, 홍콩중문中文대학교 중국문화연구소 편찬, 1991)을 위해 <중국무협소설총론>이라는 장문의 글을 보완하여 썼다. 대만 작가의 작품에 관한 부분에서는 바로 전작의 논점을 참작하였다. 정말 일거양득이고,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뒤이어 나는 <대만 10대 무협명가 대표작>(1992)의 편집장을 맡아 융단식 검색과 독서를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3년 동안 책의 바다를 종횡무진하며 지혜와 정성을 다하여 <눈 내린 강에서 홀로 낚시질하다 獨釣寒江雪>에 편집장 서문 및 10편의 무협명작 평가에 관한 글을 집필하였고, 판본을 정선(精選)하여 텍스트도 다시 정리하였다. 그 일은 비록 출판사 사람의 계획이 좋지 않아서 대륙에서 발행된 것은 어쩔 수 없이 <대만 무협 소설 “구대문파” 대표작>(상관정上官鼎의 <침사곡沉沙谷>을 무단으로 빼버림)으로 바뀌었고, 또한 교열(校閱)을 맡은 사람이 직무를 심하게 태만히 하여 오류와 누락이 백출(百出) 하였고, 이로 인해 일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는 이미 풍부한 자료로부터 정화(精華)를 취했고 탁한 물을 흘려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였으며(激濁揚清) 무단(武壇)의 생존해 있거나 유명을 달리하신 제공(諸公)에 대해 모두 설명하였으니 평생의 위안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역주 開本(절본)
출판물의 페이지 크기, 즉 한장의 완전한 인쇄 용지(전지)를  자른 매수를 가리킨다. 인쇄업에서는 통상 인쇄 및 제본을 위해 특정 규격의 전지를 여러 개의 작은 조각으로 균일하게 자른다. 분할된 장수에 따라 全開(절단되지 않은 전지), 對開(2절, 2장 절단), 4절(4장 절단), 8절, 16절, 32절, 64절 등이 있다. 전지의 크기는 국가, 지역, 출판물의 종류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발행본의 가로 세로 치수는 일정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