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소설로 벗을 만남(以俠會友)", 그리고 나의 심미관
1994년에 출판된 <논검-論劍무협소설담예록談藝錄>은 내가 위에서 언급한 논증을 기초로 한 하나의 총결론이다. 이 책은 크게 '무협고금담(古今談)', '근대무협 명가명저선평(名家名著選評)', '당대(當代) 무협 명가명저선평'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중국 '무협문학'의 역사 연혁에 대한 종횡으로 교차하는 거시적 논술뿐만 아니라 근/당대의 개별 무협명작에 대해서도 상세한 논평과 반성이 있어 참고가치가 없지 않다. 특히 대만의 유명한 작가들은 대부분 나와 한 번쯤은 만난 인연이 있는데, 그 사람을 알고 그 작품을 논한 것은 비록 정확하다고까지는 할 수 없더라도 멀리 벗어나지는 않았거나 혹은 작가의 '창작 심경(文心)'에 더 가깝지 않을까?
1976년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얼굴을 내놓았을 때 가장 먼저 친교를 맺게 된 무협 명가가 바로 고룡이었다. 이 분 일대의 귀재(鬼才)는 머리가 크고 몸집이 작으며 친구 사귀기를 좋아해 '자리는 늘 손님으로 가득 차고 잔에 술이 비지 않는다(座上客常滿, 樽中酒不空) '고 할만했다! 그때 그는 이미 큰돈을 벌고 있어서 의기양양해서 손님을 초대할 때마다 사치스러운 자리를 마련하고, 시작하자마자 네다섯 병의 양주로 호사스러움을 나타냈다. 그 성정이 호탕해서 종종 술을 따르자마자 잔을 비우고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으며 흥이 나서 '무협 연혁'을 신나게 이야기하면 도도히 이어져 끝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고룡소설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인성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도식화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사마령의 작품 광(狂)이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초기에는 사마령에게 받은 영향이 매우 컸음을 시사했다. 또한 김용과 그 자신을 제외하면 사마령이 대만에서 가장 인정할만한 작가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듬해 나는 처음 홍콩을 방문해서 오랫동안 마음속으로 흠모하던 사마령(司馬翎)을 만났는데 그는 눈빛이 그윽하고 얼굴은 야위었으며, 약간의 학자풍을 띤 문사였다. 다른 사람과 이야기할 때 그는 항상 사려가 깊었는데 말을 가볍게 하지 않았지만 일단 꺼내면 반드시 정곡을 찔렀다! 마치 그가 그려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지혜로운 무림고수처럼. 그때 그는 이미 기본적으로 무단을 떠난 상태였는데 나와 어렸을 때 어떻게 학교를 그만뒀는지, 환주루주의 <촉산 蜀山>의 세계에 온 정신이 빠져들어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고룡의 드높은 기세와 추월에 대해서는 살짝 웃기만 했는데 달리 생각하는 바가 있는 듯했다. 그도 무협소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덮어놓고 세속에만 아첨하고 시장에 코를 꿰어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1983년 그는 내 요청으로 다시 한번 산을 나서(出山) 힘을 모아 비우천관(飛羽天關)이라는 작품을 썼는데 누가 알았겠는가, 모 신문사에 의해 중간에 잘려버려 평생의 한으로 여기게 될 줄을.
모용미는 내가 친교를 맺게 된 세 번째 무협 명가이자 오랜 친구인 당문표(唐文標) 교수가 높게 평가하는 분이다. 그 천성이 활달하고 유머러스하며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아 스스로 '연주상인(煙酒上人)'으로 호를 정했다. 그는 비록 문단의 신예 출신으로서 현대문학 기법에 익숙하기는 했지만 환주루주 이야기를 꺼내면 여전히 희색이 만면했다. 자조(自嘲)적으로 "곱추가 씨름을 하면 머리와 발이 동시에 땅에 닿지 않는다(駝子摔跤, 兩不著地)"는 말처럼 매번 문예와 무협 창작의 두마리 토끼를 쫒다가 둘 다 놓치는 허망한 결과가 될 때마다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아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밖에 와룡생(臥龍生), 제갈청운(諸葛青雲), 고용(高庸), 진홍(秦紅), 소일(蕭逸), 유잔양(柳殘陽) 및 이용(易容) 등의 사람들과도 나는 일찍이 '논검(論劍)'의 우정을 나눈 적이 있다. 그중에서도 '마음은 있어도 나이가 들어 힘이 부족한' 우지굉(於志宏, 무협출판가)이 중개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중간에서 열심히 연락하지 않았다면 이 은퇴한지 오래되어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노작가들이 한곳에 모두 모여 나와 함께 무를 이야기하고 협을 논(談武論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 씨는 교제 범위가 넓고 일찍이 대만 무협 창작계에서 여러 해 동안 종사하여 그들의 인생 경력과 생활 습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나의 관련 논저에서 대만의 무협 명가와 관련된 모든 기초자료는 대부분 우 씨가 제공한 것으로 그 공이 매우 크다! 그렇지 않았다면 몇 년 후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이 그 생명과 함께 모두 사라져 드러나지 않고 필연코 역사에서 잊혀질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독자에게 큰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고룡, 사마령, 모용미, 와룡생, 제갈청운, 고용 심지어 우지굉까지 여러 협형(俠兄)들이 모두 선후로 세상을 떠났으니 지금에 이르러 옛일을 생각하니 어찌 한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 생각해보면 어떤 이는 "무협작가와 친구가 되는 것이 이론 저술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고요한 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니 확실히 방해를 받지 않았다. "경중(輕重)의 판단에 사사로움이 없고, 애증(憎愛)에 따라 치우치지 않는(無私於輕重, 不偏於憎愛)" 것이 나의 일관된 이론 저술의 준칙이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의 입장이 편파적이고 호오(好惡)의 감정에 치우친다면, 어떠한 공신력도 말할 수 없고, 더욱이 많은 독자와 전문가의 동의를 얻을 수 없다. 이 중 중요한 부분은 본인이 예전부터 가지고 있는 무협 심미관과 관련이 있어 한 번 서술할만한 가치가 있다.
현상에 입각하여 논하면,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미적 판단 경험을 가지고 있다. 크게는 산천의 풍경과 문학 예술을 감상하고 작게는 새, 짐승, 벌레, 물고기, 종이, 붓, 먹, 벼루를 품평(品評)하는데,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은 없다. 무협소설만 놓고 보면 선인(先人)들이 쓴 무협 작품을 읽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주관적인 인상과 느낌을 형성함으로써 이를 통해 선악과 미추(美醜)를 인식하는 하나의 체득과정이다. 심미 경험이 풍부한지 여부는 무협 작가와 독자에게 똑같이 중요하다. 작가는 그 특유의 심미 경험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문화적 수양 조건을 배합하면 더 나은 작품을 쓸 수 있다. 독자는 끊임없이 심미 경험을 축적하여 견문이 넓어지면 점차 인지, 감상 능력을 향상시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다만 무협 평론가와 일반 독자의 오락 취향은 또 다르다. 그는 반드시 그 심미 경험을 총괄하고 그 속에서 몇 가지 무협 미학의 법칙을 귀납(歸納)하여 그것을 근거로 작가 작품의 우열과 득실을 판정해야 한다. 내가 줄곧 견지해온 무협 심미관에 따라 말하자면 중요시하는 것은 문필, 잡학, 정취, 개척성의 네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지는 셋이다.
첫째, 문장이 매끄러워야 함은 기본 요구사항이며, 나아가 문장의 세련됨과 홀연 긴장시켰다가 이완해주는 필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대만의 일반 무협 작가는 기껏해야 위에서 서술한 '기본 요구사항'에만 부합하고, 문장이 세련된 사람은 이미 거의 없다. '정취'를 조성하거나 무예 연마나 감정묘사에 관해 말하면 명수(名手)는 우연히 얻는 '신품(神品)'이라 어쩌다 만날 수 있을뿐 더욱 구해지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잘나가는 홍콩 작가 황이(黃易) 같은 이도 기본기가 부족하여 낱말을 고르고 문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매번 실수가 많다. '세련' 두 글자와는 여전히 거리가 먼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논할 필요가 있겠는가!
둘째, 잡학은 작가가 가진 학문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고, 시사가부(詩詞)歌賦), 금기서화(琴棋書畫)에서 의복성상(醫卜星象), 풍수지리에 이르기까지 아는 것이 많을수록 좋다! 이것들은 ‘기정(奇情)‘ 위주의 무협소설이 극히 흡인력을 갖는 매력적인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 작가 중 유일하게 사마령만이 '전 분야에 능통'했고, 제갈청운‧모용미 등은 단지 각자 자신의 관점만 견지했을 뿐이다.
셋째, 개척성은 일반적인 소위 "창의성"과 같지 않다. 비록 둘 다 심미적 경험에서 영감을 받아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개척성은 낡은 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만드는데 뜻을 두고 선인의 틀에서 벗어나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들을 뛰어넘고 나아가 스스로 고인(古人)의 선구적인 가치를 만드는 것이다. 창의성이 단지 쓸모없는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창조하거나 선인의 작품을 차용하여 작품에 쓰거나 혹은 새로운 구상이나 모양새를 만들어 내는 것과는 같지 않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대만의 무협작가 중 뛰어난 사람은 대부분 창의성이 풍부하며 예를 들어 상관정, 모용미, 운중악, 소일, 진홍, 고용 등이 모두 그러했는데 독창적인 인물 스토리를 가지고 있어 능히 한 시대의 무협 신풍(新風)을 개척할 수 있었던 사람은 앞에 와룡생, 가운데 사마령, 뒤에 고룡 단지 이 세 명에 불과하다.
위에서 제시한 몇 가지 무협 심미원칙은 필자가 여러 해 동안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다"라는, 신체의 감각을 통해 객관적인 존재를 인식하는 인생의 세 경지를 거친 후에 귀납적으로 도출해낸 조그마한 깨달음이며, 그 사이에 한때 "산을 보면 산이 아니고, 물을 보면 물이 아니다!"고 잘못 판단하여 내 발에 돌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경험이 늘어남에 따라 결국은 '산을 보면 산이고 물을 보면 물이다'라는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안목과 식견이 크게 달라져서 1998년 졸작 <무협소설 창작론 최초탐구(初探)>와 <김용소설 미학과 그 무협인물의 원형을 논하다>에서 비교적 깊이 있게 논했다. 여기에서는 나의 담무논협(談武論俠)에 대한 기본적인 견해만 간략히 제시하였을 뿐, 무슨 ’털을 불어 헤쳐서 결점을 찾는다(吹毛求疵)'거나‘ ’ 부자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한다(劫富濟貧)‘ 같은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식이 깊은 군자들께서 살펴봐 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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