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불을 켜고 검을 본 지 50년 1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14. 11:49 Posted by 비천호리

섭홍생
나는 일찍이 금릉의 아름다운 궁전(玉殿)에서 꾀꼬리가 새벽에 노래하고, 진회하변(秦淮河邊) 정자에는 이른 봄 꽃이 활짝 핀 것을 보았는데, 모든 것이 얼음 녹듯 이렇게 쉽게 사라질거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이 으리으리한 집을 짓는 것을 보았고, 연회에 북적이던 손님들을 보았는데, 그 큰 집이 무너지고 없구나! 이끼 낀 푸른 기와 더미 안에서, 나는 일찍이 풍류스러운 잠을 잔 적이 있어, 이 50년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보았다. 
(俺曾见金陵玉殿莺啼晓, 秦淮水榭花开早, 谁知道容易冰消!眼看他起朱楼,眼看他宴宾客, 眼看他楼塌了! 这青苔碧瓦堆, 俺曾睡风流觉,将五十年兴亡看饱)
- 공상임(孔尚任)의 <도화선桃花扇‧애강남哀江南>곡 가사에서 발췌

반세기 이래 대만 무협의  상전벽해(桑田碧海) 같았던 역사의 페이지를 펼쳐 보면, 종이 위에서 패권을 다투고(紙上爭雄), 풍운을 질타(風雲叱吒) 하던 한때의 호걸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던가! 그러나 북두성이 방향을 틀면 뭇별들이 자리를 옮기듯 세월이 유유(悠悠)히 흘러, 휘황찬란했던 과거는 바람 따라 사라져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재주가 없는 나는 일찍이 그 시작에서 쇠락까지의  전 과정을 목격하고 직접 경험하였다. 지금을 어루만지고 옛일을 생각하면 절로 운정산인(雲亭山人) 공상임과 같은 감회가 떠오른다. 이른바 "쇠잔(衰殘)한 군대는 아직도 폐허가 된 보루를 지키고 있고, 여윈 늙은 말은 빈 해자(垓字)에 누웠구나(殘軍留廢壘, 瘦馬臥空壕!)." 하는 것이다. 비록 서로가 가리키는 시공간의 사물은 전혀 다르지만 심경은 똑같다.

지난 일을 돌아보면 내가 여덟 살 때부터 '촉산검협 연환화'를 통해 무협서와 인연을 맺은 지도 어느새 50년이 다 되어 간다. 등불을 켜고 검을 본 이 50년 동안은 공교롭게도 대만 무협소설의 발흥부터 성장, 흥성과 쇠미, 몰락에 이르기까지 모든 흥망성쇠의 역정(歷程)이었다. 나는 운 좋게도, 직접 그 흥성함을 만나 약간의 무협 명가와 교류하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그 창작의 비밀을 연구‧토론하기도 했지만, 또 불행히도 그 군사가 몹시 지치고, 군심이 흩어지고, 더 나아가 삶과 죽음조차 쓸쓸해져 잊혀지는 것을 목도했구나! 이러한 점들을 하나하나 온전하게 기록해두지 않으면 장차 개인 혹은 수천만 명의 무협 독자들에게 큰 유감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어떻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태도를 가지고 논술의 책임을 다하면서 역사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릴 것인가는 나의 양보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사명이자 인생의 과제가 되었다.

다만, 대만 무협소설의 흥망성쇠를 위해 역사를 쓰는 것은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는 작가, 출판사, 시장 수급, 사회 풍토 등 4가지 측면의 주관적·객관적 요소와 그것들 사이의 상호작용 관계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중 작가와 작품의 기본 자료는 특히 충분히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그렇지 않으면 틀린 것을 다시 틀리게 전할 우려가 있고, 각 명가(名家)의 소설 스타일과 특색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소간 변화하므로(주로 독자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함), 경솔하게 결정해서도 안 된다. 무릇 이러한 일들은 경위(經緯)가 다양하기 때문에 그 어떤 ‘독행협(獨行俠)’이라도 혼자서는 할 수 있는 힘이 없다. 하물며 대만의 공립도서관은 수십 년 동안 구판(분집 인쇄 36절본)의 무협소설을 수집해서 소장하지 않았고, 사영(私營) 소설대여점은 이미 분분히 판형을 바꿨거나 휴업하여, 참고할 만한 오래된 책이 거의 없게 돼버렸다.

이것은 확실히 매우 처리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역사를 쓰려는 사람에게 비록 하늘에 통하는 능력이 있더라도 관련 문헌(이것은 1차 자료, 즉 무협서 원본을 가리킨다)의 증빙이 부족하면 쌀 없이 밥을 지어봐야 모든 것은 그림의 떡이 되는 격이다. 개정 후 '새로운 텍스트 판본'은 내용이 반복적으로 추가, 삭제 및 재배열되었기 때문에 이미 원래의 모습을 복구할 수 없게 되어 '믿을만하고 증거도 있는' 것을 만들기는 대단히 어렵다.

헌책 노점에서 "보물찾기"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다.
실로 대만 무협출판계는 1977년 전후로 판형 대혁명(36절본에서 25절본으로 변경)을 겪으면서 대여업자들이 점차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게 되었고 구서판형(舊書版型)은 대여점에서 거의 종적을 감췄다. 만약 미리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면, 미리 대비하지 않았을 것이고, 또 기회와 인연이 공교롭게도 맞아떨어지고, 복이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았다면, 이런 '오래된 골동품'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주 다행히 나는 어려서부터 큰 뜻이 없어서 일찍부터 홍콩, 대만의 구판 무협서(원간본, 재판, 갱신판 포함)를 수집했고, 약간의 수확도 있었다. 이번 기회에 내 개인의 과거 '보물찾기' 경험을 다 털어놓아도 괜찮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온갖 것들은 내가 반평생 동안 무(武)에 대해 이야기하고 협(俠)을 논(論)하며 '책을 증거'로 추구하여 지금에 이르러 무협 패사(稗史) 집필에 참여하게 된 기회와 인연에 어느 정도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무릇 대만의 오랜 무협광들은 모두 과거 물자가 부족했던 시절에 무협소설을 보고 싶으면 대여점에 가서 딱딱한 벤치에 앉아 불편함을 참아가며 읽거나(苦讀), 아니면 책 전체를 빌려 집으로 돌아가 서로 앞다퉈 돌려 읽으며 번갈아 '연공(練功)'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창때는 약 3,4천 개의 소설대여점이 대만의 구석구석에 있었는데, 비용을 절약하는데 알맞았고 대여점들은 일반적으로 대여만 하고 판매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협 소설을 수집해서 소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전통관념에서 무협 도서는 줄곧 '심심풀이로 읽는 책(閑書)'으로 여겨졌고, 음행과 폭력을 가르친다는 등의 죄명이 많고도 많았다. 누군가 집에 무협서를 소장한다고 한다면, 틀림없이 "머리가 어떻게 됐거나", 우둔하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내가 구판 무협서를 수집해 소장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일찍부터였는데, 열 여섯살에 타이베이에서 유학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학교는 명성이 자자한 고령거리(牯岭街) 헌책방과 인접해 있었고, 그곳에는 매일 보물을 찾는 각 방면 인사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나는 이 명승지에서 뜻밖에도 환주루주의 <촉산검협전>(홍콩 홍문판) 전본(全本), 김용 <사조영웅전>의 세 종류 잔본(殘本) 및 성명을 모용한 위작 <사조전전射雕前傳>, <구음진경九陰真經> 등 모두 조사금지(査禁) 사건에 포함된 홍콩 책들을 발견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동하여 급히 내 소유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공교롭게도 가난한 학생이라 주머니에 돈이 없었으니 이를 어찌할까! 그때 나는 부모님 몰래 3개월 넘게 입고 먹는 것을 아끼고서야 비로소 이를 악물고 이 구서(舊書)들을 샀던 기억이 나고, 나와 함께 수많은 고단하고 적막한(孤單寂寞) 세월을 보냈다. 이 책들은 내 최초의 무협 장서여서 더욱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196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항(東港)의 고향집에서 나를 마중 나온 아버지는 큰 마대자루에 담긴 무협소설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라 "네놈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구나"라고 꾸짖었다. 이렇게 몇 해 동안이나 거론하시니 오래도록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이 때문에 겨우겨우 비집고 대학문을 들어섰는데, 그 후 신문과 잡지에 <무협은 어디로 가는가?>, <현대 무단武壇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등의 잡문을 잇달아 발표하여 사회의 인정을 약간 받게 되자, 아버지는 비로소 "오, 결국에는 헛수고하지 않고, 방문좌도(旁門左道)로 수행해서 정과(正果)를 이룬 셈이구나!"라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렇지만 그 어른께서 어찌 예상이나 하셨겠는가, 이것은 단지 내가 중국 무협 미학을 탐색한 첫 번째 부분일 뿐,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천 자루의 검을 본 후에 비로소 검을 알아볼 수 있다"는 성찰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언론계에 들어가 근무했고, 업무 중에도 여가 시간에는 여전히 대여점으로 달려가 무협 서적들을 두루 섭렵했다. 1977년 말,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무협소설 출판업계의 선두 주자인 진선미출판사가 영업을 접고 곧 '재고 정리'를 할 것이라는 신문기사가 실렸다. 소식을 듣고 나는 즉시 달려가 닥치는 대로 사들였지만 아쉽게도 한 발 늦고 말았다. 사마령의 관락풍운록(關洛風雲錄), 학고비(鶴高飛), 고룡의 철혈전기(鐵血傳奇), 해상격축생(海上擊築生, 성철오 成鐵吾)의 남명협은(南明俠隱) 정집(正集), 속집(續集) 등 몇 권 안 되는 책을 제외하고는 그밖에 소장할 만한 소설은 모두 눈썰미 있고 발빠른 사람에게 선점당해 후회막급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얻지 못한 책은 같은 무협 도상(道上)의 사람이 가져갔고(楚弓楚得) 각자의 연분에 달려 있지만, 좋은 기회를 놓쳤기에 결국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그때의 경험과 교훈으로 나는 "시간과의 싸움"의 중요성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고, 더욱 열심히 오래된 책을 수집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회는 우연히 오는거라 찾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고, 우연히 수확이 있더라도 매우 한계가 있어서 없는 것 보다는 낫다는 정도의 약간의 위안일 뿐이었다.

목차

대만무협소설발전사 2023. 4. 5. 21:09 Posted by 비천호리

서언·쌍검합벽으로 누락을 보완해 온 역사 - 양창년
서언·협의의 영혼과 인문정신 - 서사년
서언·등불을 켜고 검을 본지 50년 - 섭홍생
서론(緒論)‧통속·무협·문화 - 임보순

제1장 문화사막의 선인장—대만무협창작의 발흥기(1951~1960)
  제1절  민국 '구파'의 요람과 대만무협의 탯줄
  제2절  '무협선구자' 낭홍완과 신문, 잡지 연재소설
  제3절  '무단삼검객' 각자 한 시기의 문학을 이끌다.
  제4절  출판금지령과 폭우전안(특별)사건

제2장 온갖 꽃들이 한꺼번에 피어난 10년 동안의 봄—대만무협 창작의 흥성기 (1961~1970)
  제1절  급속한 경제발전과 사회변동
  제2절  8대 서계(書系)와 무협 혁신운동
  제3절  '신파무협' 혁명가 - 고룡, 강호를 통일하다.
  제4절  철혈강호의 두 양상 - 유잔양과 운중악
  제5절  대만의 대표적 작가 - 육어와 진홍

제3장 장강의 물은 동쪽으로 흘러가 돌아오지 않는다. - 대만무협 창작의 퇴조기(1971~1980)
  제1절 매체 보급 상황에서의 무협소설
  제2절 무협창작의 내적 곤경
  제3절 “김용 선풍”과 그 충격
  제4절 신구판본 교체와 시장의 악성 경쟁
  제5절 신문·잡지의 비평 소개와 무협소설 논쟁

제4장 매미는 울음을 남기고 다른 가지로 건너간다 - 대만무협창작의 쇠미기(1981-2000)
  제1절 무단 노장의 '봉검(封劍)', 뒤를 이을 사람이 부족하다.
  제2절 '현대파/초신파' 어느 길로 갔는가? - 겸하여 온서안을 논함.
  제3절 색정(色情) 무협작품이 넘쳐나 재앙이 되다.
  제4절 대만무협의 '대륙상륙', 두 번째 봄을 찾는다.
  제5절 무협논저 및 그 연구개황

결론  어쩔 수 없이 꽃이 지다.
부록  대만무협소설 명가 20인 작품목록

3. 무협의 장래 전망
 많은 독자를 보유한 통속소설도 그가 차지하는 지위가 당연히 있어야 할까?
비록 협패작가의 창작동기가 “생계”를 위한 경우가 많지만, 명가 작품의 인물, 구성, 감정부터 도리에 이르기까지의 의미가 반드시 정통문예의 가치보다 약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또, 더군다나 독자 수 비율의 차이로 보면 그 영향력은 한결 우월하다. 20세기 중엽 무협소설이 대중의 환영을 받을 당시 부정적인 면의 배척과 멸시의 그물도 동시에 펼쳐졌다. 스스로 정통이라고 자처하는 자 중에는 읽지도 않고서 나쁘게 말하는 고루하고 진부한 사람과 공개적으로는 악평을 하면서도 비공식적으로는 몰래 흥미진진하게 보는 위군자(僞君子)도 있었고, 점잖은 체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두 부류가 똑같이 꽉 막히고 견식이 천박한 필부였다.
20세기 후기에 이르러서야 약간 개선되어 협패소설류는 정시(正視, 똑바로 보다)를 받게 되었고(여전히 重視는 아니다), 협패작가도 마침내 떳떳하게 평시(平視, 나란히 보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당연히 仰視는 아니다).

실로 문헌사료는 대만협패가 50년대에 시작되어 60년대에 흥성하였고, 마침내 70년대의 퇴조(退潮)와 80년대의 쇠퇴(衰退)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노정(路程)에서 하이라이트를 받은 시기는 기실 10년을 넘지 못한다. 밀물이 들어오듯 일어났다 썰물이 빠져나가듯 쇠락하였는데 통속문학사 측면에서 말하자면 마치 혜성같이 그 특이한 밝고 아름다움을 하늘 끝에 긋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려, 매화나무 아래서 잠을 깨었을 때 이미 달은 지고 하늘이 밝아오고 있는(明月梅花一夢)는 듯한 비애를 느끼게 된다.

섭, 임 두 분이 일찍이 쇠락의 원인을 분석했기 때문에 필자는 여기에서 약간의 보충만 하고자 한다. 확실히 내 친구 피술민(皮述民) 교수의 말처럼 무협소설의 흥성은 “독자의 고민”에서 말미암은 것이라 일반문예 창작의 동력이 작가의 “고민의 상징”에서 나온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독자들의 고민은 반드시 시대의 변화를 따라 바뀌는 것이라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하여 대중의 독서 취미가 바뀌었을 때 사람마다 한권씩 다 가지고 있었던 성황(盛况)은 자연히 더는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렇다면 앞으로 협패의 장래는 과연 어떠할까?
이대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최고 수위(水位)를 재현할 것인가?
 필자가 우언(寓言) 하자면, 혹은 인류 종(種)이 유전(遺傳)하는 “투쟁”의 원형(原型)에 기초하거나 혹은 인간세상에서 영원히 피하기 어려운 불공평에 말미암아 협패의 표현모델은 독자의 쌓인 불만을 위하여 그림의 떡으로 굶주린 배를 채우는 식의, 없는 것보다는 조금 나은 도원(桃源)을 제공할 것이며, 보아하니 그것이 숙명인 것 같다.

 장조(漲潮)가 <유몽영(幽夢影)>에 적기를 “가슴속 작은 불만은 술로 달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큰 불만은 검이 아니고서는 풀 수가 없도다!(胸中小不平,可以酒消之;世間太不平,非劍不能消也!)”라고 하였다. 맞다! 그러니 통쾌하게 술을 마시자! 당신의 인생 중 어쨌든 불가피하게 마주친 큰 악당(巨奸大憝)의 부류나 사악한 무리와 이치를 따졌는지 생각해 보라,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국법(國法)에 호소하자니 만족스럽지 않거나 더뎌서 도움이 되지 않은 관계로 단지 실컷 때려 주거나 끝내는 장검(長劍)이 그를 다섯 걸음에 피를 흘리도록(血流五步) 해야만 비로소 통쾌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호전> 가운데 “노제할이 진관서를 때리다(魯提轄拳打鎭關西)“ 부분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까닭이며 억만인(億萬人)의 마음이며, 난세 심지어는 말세를 만나서도 간악(奸惡)한 자를 몹시 미워하고 영웅호걸을 동경하는 공통의 심리이다.
 더구나 제거하는 쾌감의 가상균형 외에도 독자들은 작가들의 감정과 이념을 함께 나눈다. 감정에 의한 감화든 또는 도리에 의한 반성(反省), 사고(思考)든 상관없이 모두 문예기능이 사회를 개선하는 효과가 아니겠는가?

필자는 문체(文體)나 장르(文類)의 성쇠(盛衰)는 마치 왕조의 흥망과 흡사하게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늘 일류인 재능 있는 작가는 여기에 힘을 써 옛것을 녹여 새로움을 만들어 내어야 비로소 독창적이고 후세에 모범이 될만한 훌륭한 업적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대련(對聯) 문학을 샘플링해보면 그것은 일종의 짧고 간단함에 국한된 속성을 가졌지만 증국번(曾國藩)의 손에 이르러서는 응대, 서술, 감정표현, 비평...에 능히 쓰여 자유자재로 구사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앞으로 협패의 주제의식의 역할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표현형식과 수법과 반드시 이전과 달라질 것이다. 원래 저속함이 없지 않았던 탐정 플롯이 환골탈태하여 깊고, 참신하고 과학적인 추리소설이 된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렇다, 우리들은 협패가 다시 살아날 시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포부를 가진 일류고수가 강호에 출현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또한 섭, 임 두 분이 힘을 쏟는 연구와 평론의 여정(旅程)이 홀로 걷는 길에서 점차 앞뒤로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심혈을 쏟아 얻은 심득(心得)이 무협안내의 탄탄대로가 되어 신예들로 하여금 이를 모방하여 매가 높이 날아오르듯 문명(文名)을 멀리 떨치기를!

이로써 서문으로 삼는다.
 2005년 3월 18일 타이뻬이(臺北)에서

2. 섭·임의 쌍검합벽
   보순(保淳)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국립정치대학(國立政治大學)에서 그가 알고 있던 연구생 한명을 테스트하기 위해 초청받아 가서였다. 3층에 장소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나는 원래 그의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철괴리(鐵拐李)가 3층에 올라오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알게 되어 매우 미안해하였으나 그는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그가 담강대학(淡江大學)에 무협소설연구실을 만든 것을 진귀한 일로 생각했으나, 그의 논저를 읽은 후에는 더욱 괄목상대(刮目相對) 하게 되었다. 그의 꾸준한 연구가 이미 성취를 이룬 것에 경의를 표하며 더욱이 그가 독창적인 것은 소금에 절인 생선을 다시 살려내듯이 대만협패를 다시 살려낼 희망에 공헌한 점인데, 그의 일반적인 그것과는 다른 겸허함에 감명을 받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나로 하여금 현재 학술계의 중견학자에 대하여 다시 신뢰를 갖도록 하였다.

보순을 통해 “남천일엽(南天一葉) 홍생(洪生) 형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는 다재다능한 작가이자 평론가이다. 일찍이 그가 만든 경극(京劇)CD는 나로 하여금 몇 번이고 다시 듣도록 만들었으며 처량하고 격앙된 노래 가락 가운데서 홍생의 재주꾼으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나는 줄곧 문학비평에서 중점은“재창조”가 요구되는지 유무에 있다고 생각해 왔다. 비평자가 자기의견을 갖지 않으면 단지 “환원(還原)”이거나 “부회뇌동”에 불과하여 무슨 논할만한 가치가 있겠는가!

나는 홍생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고 본다. 그의 <천하제일기서(天下第一奇書)-촉산검협전(蜀山劍俠傳) 비밀탐색>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렇게 한겹 한겹 조개껍질을 벗겨내듯이 문장의 주제를 매우 적절하게 나타내고 있어서 비단 홍생의 평론 솜씨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가 문헌에 정통하여 이를 융합한 후에 훌륭하게 스스로 얻어낸 것이다.

<대만무협소설발전사>는 섭·임 쌍검의 공동저술로 완성되었고 제재(題材)를 상세하고 완전하게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읽기에 막힘이 없어 검색과 연구의 필요에 족히 공헌할 만하며 더욱 큰 가치는 각 명가에 대한 분석에 있다. 평론가의 재창조를 통하여 史傳(역사서와 경전)처럼 광휘(光輝)가 환히 빛나, 살아 있거나 세상을 떠난 각 명가를 능히 위로할 수 있으며, 또한 독자들에게 새로운 감상과 분석의 바탕을 제공하며 더욱이 오랫동안 침체된 협패의 세상을 안내하는 밝은 등불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