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名著大觀) 서문 2

무협 일반 2016. 9. 29. 20:26 Posted by 비천호리

80년의 긴 노정을 거쳐 무협소설 연구는 초보적인 중요성과를 취득하였고 이는 매우 기뻐할만한 것이다. 하지만 한 단계 더 높이 오르려면 여전히 많은 대단히 어렵고 힘든 작업을 해야만 한다. 내 생각에 당장 급한 일은 두 가지 기초공사를 완성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중국무협소설총목제요(中國武俠小說總目提要)"라는 대형도구서를 편찬하는 것이다. 구파무협소설이 비록 ”원앙호접파연구자료“에 비교적 온전한 도서목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도서 이름의 기록(게다가 약간의 착오와 누락이 있다)일 뿐이며 각 소설의 출판년도, 대략적인 내용, 판본상황, 상호관계 등은 매우 분명하지 않다. 약간의 연구자들은 원저를 전혀 읽지 않았거나 자세히 읽지 않음으로써 적지 않은 기본지식성의 착오를 드러내어 갑을 을로 착각하거나 심지어는 소설 중의 인물을 작자의 농담으로 여기기까지 한다(예컨대 환주루주의 사회소설 征輪俠影을 무협소설로 여기고, 荒江女俠의 남녀 주인공 岳劍秋, 方玉琴을 30~40년대의 영향력 있던 南派작가로 여긴다).
 
홍콩·대만의 신파무협소설의 상황은 더 복잡하여 거의 매 작가마다 나쁜 무리들이 몇 부, 십 몇 부, 몇 십부 심지어는 백 여부 이상의 남의 이름을 사칭한 위작을 꾸며내 물고기의 눈알을 진주에 섞은 것처럼 되어 3부의 무협소설사전과 ”신무협 작가 20인(新武俠二十家)“에서 모두 위작(예를 들면 고룡을 사칭한 劍氣滿天花滿樓, 사마령을 사칭했지만 실은 易庸이 쓴 河岳點將錄)을 진품으로 오인하도록 만들었고, 그리하여 엄숙하고 진지하게 어리석은 일을 예술분석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마땅히 ”무협소설작가소전(小傳)" 한 부를 편찬하고 매 작가의 뒤에 하나의 “창작연표” 혹은 “출판연표”를 붙여야 하는데 이 작업은 난이도가 매우 높아 심지어는 “총목제요(總目提要)” 편찬의 어려움을 넘어설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이 두 작업은 결코 단기간에 몇몇 사람의 힘에만 의지해 단번에 성공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며 중국대륙, 홍콩, 대만 세 곳의 연구자(경력이 풍부한 무협출판업자를 포함하여) 모두가 힘을 합하여 “학문을 하는 사람은 인내하며 차가운 의자에 10년을 앉아 있게 되더라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헌신의 정신을 가져야만 비로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과학연구라도 모두 착실한 기초연구로부터 시작하여 토대를 단단하게 다진 후에야 마천루(摩天大樓)는 비로소 으리으리해질 수 있다. 생각건대 진정한 무협문학연구자는 모두 이러한 헌신정신이 있을 것이다.
 
수 많은 “무협광”과 마찬가지로 나는 어려서부터 무협서적에 심취하였고, 소학교에 다닐 때부터 가판대에서 무협 “아동도서”(連環畵 책)을 보았었고, 중학생이 되어서는 구파무협소설을 집으로 빌려와 맹렬히 읽었고 80년대부터 밤을 꼬박 새우며 구파 작품을 복습하고 신파 작품을 즐겁게 읽었다. 그 동안 장병우, 서기개, 서지명, 주취제, 풍지상, 왕중삼, 채량희, 양강화, 낙유청, 주지용, 저대위, 조정문, 유덕융, 당발요, 남범, 노윤상, 왕정, 황명 등 친구, 동료, 동행자 수십 분과 수없이 많이 독서 심득을 교류하였고 후에는 손계림, 풍금우, 주용금, 풍패령, 염중영, 황수훈, 예사정, 장진선, 진희극 제군(諸君)의 도움을 얻어 수 많은 원저와 관련 자료를 수집하게 되었다. 환주루주와 그 작품에 대한 깊은 흥미로 인하여 선후로 북경근대문학연구 전문가 배효유, 환주루주의 자녀 이관현, 관정(觀鼎), 관숙, 관홍, 관정(觀政), 천진 학자 장공생, 대만 학자 섭홍생, 소주 학자 서사년, 북경 학자 금개성, 남경 학자 주희 및 백우(白羽)의 영식 궁이인과 왕도려의 부인 이단전을 알게 되었다.
 
그들을 통하여 고룡의 진실한 벗이며 대만의 경력이 풍부한 출판업자이자 작가인 우지굉(우동루), 대만출판업자 왕달명, 대만 학자 임보순, 대만 무협명가 소일, 와룡생, 유잔양, 대만 무협평론가 호정군, 홍콩 무협명가 장몽환, 온서안, 천진 작가 풍육남, 무한 평론가 왕춘계, 강소 작가 겸 평론가 이영덕(江上鷗), 안휘 평론가 나립군, 북경 평론가 진묵, 복건 유국휘, 상해 학자 가식방, 장배항, 상해 작가 사기규 제군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고, 피차간에 무협을 담론(談論) 하고 혹은 명작에 대한 의견을 나누거나 작고한 작가를 회고하거나 무릎을 맞대고 토론·연구하거나 밤새워 긴 얘기를 나누는 등 실로 얻은 것이 참으로 많았다. “섭감노시전편(聶紺弩詩全編)”을 편집한 까닭에 신파무협소설 촉진자 나부(유소)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를 통하여 요행으로 최근 홍콩으로 건너가 김용, 양우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단지 구경하기 좋아할 줄만 아는 문외한(外行)은 뜻밖에도 “비결”을 약간 아는 “전문가(內行)”가 되었다. 사행서점출판사의 팽위국, 공건성 두 분의 열정적인 초대를 받아 또 대담하게도 “중국무협소설명저대관”을 책임편집하는 임무를 받아 들였다.
 
독자가 최소의 시간으로 중국무협소설 명저의 대략적인 상황을 한 번에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본서는 근 6백 분 작가의 3천여 종 작품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33분 작가의 138종 작품(총 글자수는 약 1억이다)을 정밀하게 골라내고 50여 분의 무협전문가와 애호자에게 요약을 청하였다(매작품의 자수는 대략 원저의 1/100이다). 맡은 분 각자의 경제적 이익을 따지지 않은, 심혈을 기울인 창조적 노동을 통하여 독자들의 면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편 한 편 원저의 줄기, 독특한 맛을 보존하면서도 간결하고 막힘없는 문장의 뛰어난 이야기이자 소설감상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고 필요한 자료를 찾아내 열람하는 자료로도 이용할 수 있다. 독자가 80년대 중국무협소설의 각 大문파와 예술특색에 대하여 대략적인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특별히 무협소설발전사에 대해 수십 년의 연구 공로가 있는 장공생, 섭홍생 두 분에게 청하여 각각 구파와 신파를 비평소개하는 논문이 저술되었고 이는 매우 학술적 가치가 풍부하다.
 
독자가 무협명가의 생애에 대하여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하여 장, 섭 두분은 또 그 아는 바를 쏟아 부어 명가 소전(小傳)을 저술하여 작품의 앞이나 책의 말미에 붙였다. 독자로 하여금 신구 두 파 무협소설의 작자와 작품명에 대하여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책 뒤에는 여러 차례 정리, 수정된 한 부의 도서목록을 붙였는데 진귀하고 신뢰할만하여 이에 근거하여 출판계에 넘치는 대량의 위작을 감별해낼 수 있을 것이다.
“중국무협소설총목제요”와 “중국무협소설작가소전” 이 양대(兩大) 기초 공사를 완성하는 것은 오늘날의 시장경제의 큰 조류 가운데서는 일종의 몽상일 수 있어서 “중국무협소설명저대관”의 편집출판은 곧 잠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데 최소한 양대 공사에 약간의 유용한 벽돌과 기와를 더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서를 위하여 부지런한 노동을 들인 친구들에게 충심으로 감사 드리며 전문가와 많은 독자들의 비평과 질정(叱正)을 간절히 기대한다.

 

1994년 11월 초고
1996년 2월 개정

중국무협소설 명저대관(名著大觀) 서문 1

무협 일반 2016. 9. 28. 19:30 Posted by 비천호리

주청림(周淸霖)

 

1915년 12월 임서(林紓, 琴南)의 문언문 단편 “부미사(傅眉史)”가 처음으로 무협소설이라는 전용명칭으로 포천소(包天笑)가 책임편집한 상해 “소설대관(小說大觀)” (季刊) 제3집에 발표된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80주년이 되었다. 이 80년 가운데 북경(京), 천진(津), 상해(滬), 광동(粵), 대만(臺), 홍콩(港) 등의 근 600에 달하는 작가들의 부지런한 창작을 통해 발표, 출판된 무협소설이 이미 약 4천 종이고 단행본 누계 인쇄부수는 수억 부에 달하였다. 게다가 각색된 그림책과 영화, TV 작품은 참으로 한우충동(汗牛充棟)이라고 할만큼 많았다. 그 기간에 명가의 뛰어난 작품이 차례로 출현하여 몇 세대의 독자들은 홀린 듯 취한 듯하였고, 중국무협문학 사상 일대 기관(奇觀)을 이루었다.
 
무협소설의 열독(閱讀) 붐에 비하면 그 연구는 상대적으로 한산하였다. 나는 80년 이래 무협소설 연구는 대체로 4단계로 나눌 수 있다고 본다.
 
(1) 1951년 6월 이전이 1단계이다. 30~40년대에 좌익작가 구추백(瞿秋白), 심안빙(沈雁氷), 정진탁(鄭振鐸) 등이 근 10편의 저술을 발표하여 전면적으로 무협소설을 부정하고 “반동”적인 “봉건적 소시민 문예”로 배척하였다. 그들은 주로 사회학의 각도에서 이러한 논단(論斷)을 하였고 비록 이해되는 면이 있다고 해도 그러나 아주 큰 단편성이 있었다. 신중국이 성립된 후 심안빙, 정진탁이 문화계를 이끄는 지위(중앙문화부 부장, 부부장 각 담임)에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1951년 6월의 무협소설 출판 전면금지를 초래하였고 그 부정적인 영향이 지금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다. 구, 심, 정씨의 논단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지는 응당 무협소설이라는 이 문학종류를 정확하게 평가하는 관건 가운데 하나이어야 하지만 무협소설 연구자는 이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여전히 한 편의 무게 있는 저작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있고 이것은 무협소설 연구 가운데 하나의 중대한 결함이다.
 
이 단계 중에 서국정(徐國楨)은 1949년 상해 “우주(宇宙)” 잡지의 복간호 제3, 4, 5호에 “환주루주 및 그 작품의 연구”(1949년 3월 단행본 출판시 “환주루주론”으로 바꿈)를 발표하여 무협소설 명가 환주루주(이수민)의 생애와 인생철학에 대하여, 그 작품의 내용, 형식과 예술특징 등에 대하여 유익한 탐색을 하였다. 이는 무협소설 역사상 단 한 사람의 작가를 연구한 첫 번째 전문적인 저작이었고, 그 가운데 약간의 중요 논점은 지금도 여전히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직도 사람들의 충분한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2) 50~70년대는 2단계이다. 이 기간에 중국대륙의 가장 중요한 연구성과는 1962년 10월에 위소창(魏紹昌), 오승혜(吳承惠)가 책임편집한 “원앙호접파연구자료”가 상해에서 출판된 것이다. 비록 이 저술이 무협소설에 대하여 여전히 부정적인 태도를 유지하고는 있고 또한 무협소설을 원앙호접파에 포함시키는 것도 매우 타당하지 못하기는 하더라도 그것은 처음으로 대단히 많은 구파무협소설 목록을 수집하였고, 부분적인 무협소설가의 생애자료와 구, 심, 정씨 등 무협소설을 평론한 다수의 저작을 수록하여 무협소설 연구자에게 편의를 제공하였기 때문에 그 공로는 실로 매몰되어서는 아니 된다.
 
1967년, 중국 혈통의 미국 저명학자 유약우(劉若愚)가 시카고에서 영문판 “중국의 협(中國之俠, The Chinese Knight-errant)"을 출판하였는데, 이는 전 세계에서 첫 번째로 중국역사와 문학 중의 협(俠)의 전통을 종합연구한 전문저술이었고 체계적인 중국의 협문화(俠文化) 연구를 창시한 공로가 있다.
 
70년대, 중국대만학자 양연승(楊聯升), 당문표(唐文標), 진효림(陳曉林) 등은 10여 편의 전문저술을 발표하여 무협소설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3) 80년대~1993년은 3단계이다. 중국대륙의 개혁개방과 해협 양안의 문화교류가 날로 빈번해지는 큰 형세 하에서 신구무협소설의 대량출판 혹은 재판(再版)에 따라 무협소설 연구는 최초의 붐을 일으켰다. 인민일보, 문회보(文匯報), 문예보, 문학보, 상해문론(上海文論), 문예쟁명(文藝爭鳴), 서림(書林) 등 10여 곳의 전국적 영향력이 있는 신문, 잡지들이 잇달아 무협소설을 연구한 전문저술과 학술저작을 발표하였고, 장공생(張贛生), 나립군(羅立群), 유음백(劉蔭栢), 조정문(曺正文), 진평원(陳平原), 진묵(陳墨), 채상(蔡翔) 등은 무협소설통사, 단대사(斷代史), 총론, 작가론, 작품론 등 각 방면에서 전문저술을 출판하였으며 게다가 3부의 무협소설사전(寧宗一, 胡文彬, 劉新風이 각각 책임편집)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사년(徐斯年), 풍기용(馮其庸), 풍기재(馮驥才), 장배항(章培恒)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발표한 단편논문도 이미 백편을 넘어섰다. 북악문예출판사는 무협명가 백우(白羽, 宮竹心)의 전집을 출판하였는데, 그 “출판설명”에서 백우 작품의 판본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한 고증을 하였다. 이 출판사는 곧바로 “환주루주소설전집”을 내놓았는데 저명한 학자 금개성(金開誠)이 서문을 썼고 책 말미에는 “환주루주작품연표”와 관련된 평론을 붙였다.
 
중국대만, 홍콩의 연구자들도 중대한 공헌을 해냈다. 섭홍생은 대만연경출판공사(臺灣聯經出版公司)를 위하여 “근대중국무협소설 명저대계”를 책임편집, 비평교감한 후, 또 강소문예출판사를 위하여 “대만 9대 무협명가 대표작”을 선택편집하였고, 게다가 장편의 서문과 독서안내 글을 썼으며 단기에 또 그의 20여년 래의 평론저술을 모아 “무협소설담예록(武俠小說談藝錄)"을 출판하였다. 호정군(胡正群)은 즉 상해의 학림출판사와 강소문예출판사를 위하여 ”대만신파무협소설명작대전(臺灣新派武俠小說精品大展)"을 책임편집하였고, 또 장편의 서문, 독서안내 글을 썼으며, 게다가 뽑힌 작가의 작품출판연표를 붙였다. 심등은(沈登恩)은 오로지 김용소설 연구를 위하여 “김학연구총서(金學硏究叢書)"를 편찬하였는데 이미 20여종을 출판하였다.
더욱이 사람들로 하여금 주목하게 하는 것은 홍콩중문대학이 1987년 12월에 “국제중국무협소설연구토론회(國際中國武俠小說硏討會)”를 개최하였다는 것인데 이는 무협소설 연구가 이미 학술전당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나타내 보인 것이다. 1992년 5월 대만담강대학(臺灣談江大學)이 또 “협과 중국문화연구토론회(俠與中國文化硏討會)"를 거행하고 또한 ”협과 중국문화“ 논문집을 출판하여 무협소설 연구로 하여금 문화연구의 영역에 진입하도록 하여 하나의 새로운 경지에 오르게 하였다.
 
(4) 1994년부터 4단계에 진입하였다. 1994년 1월 28일 중국무협문학학회가 북경에서 성립을 선포하고 전국 각지에서 온 46명의 연구자로 구성된 제1차 이사회를 개최하여 남개대학 영종일 교수가 회장을 맡고 김용, 풍기용을 명예회장으로 임명하였다. 학회의 성립은 중국의 무협소설 연구가 분산된 무조직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집중된, 조직이 있고 지도자가 있는 중요한 단계로 진입하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1995년 3월 중국무협문학학회는 북경에서 “중화무협소설창작대상(中華武俠小說創作大獎)” 심사위원회 회의를 개최하여 1990년 이후에 창작된 60여부의 신무협소설 가운데 은검상(銀劍獎)과 동검상(銅劍獎) 각 3명(溫瑞安의 溫柔一刀, 于棟樓의 短刀行, 周郞의 鴛鴦血, 獨孤殘紅의 銷魂一指令, 滄浪客의 一劍平江湖, 巍琦의 金帖俠盜)을 선정하였고, 금검상(金劍獎) 2명은 곧 평생 성취상으로 하여 중국무협소설 창작에 대하여 탁월한 공헌을 한 김용, 양우생에게 수여하였다.
 
9월 하순에는 ‘95 북경무협문학 학술연구토론회가 성대하게 열렸는데 그 토론회는 홍콩, 대만에서 두 차례 열린 연구토론회를 잇는 것일 뿐만 아니라 제1차 전국 규모(대만, 홍콩지구 포함)의 학술성회(學術盛會)이기도 하였으며 근년래 무협소설 창작과 이론구축을 살펴보는 큰 모임이었다. 회의에서는 엄숙하게 “무협소설은 우리나라 문학영역의 유달리 선명하고 아름다운 한 송이 진기한 꽃이다. 2천년 민족정신과 역사의 혹독한 시련의 침윤(浸潤)을 통해 더욱이 80여년 동안 몇 대의 무협소설 작가들이 쏟아 부은 심혈에 힘입어 무협소설은 예속적인 것에서 점차 발전하여 큰 조류가 되었고, 찬란한 중화문화를 대표하는 한 종류가 되었다. 우수한 무협소설은 한결같이 애국과 정의의 기치를 표명해 왔고 개성이 선명한 이미지로 민족의 미덕, 권선징악, 激濁揚清(탁한 물을 흘려보내고 맑은 물을 끌어들이다)을 밝힘으로써 무릇 중국인이 있는 곳에는 무협이 있고, 환주광(環珠狂), 김용광(金庸狂)이 있으며 무협 가작(佳作)은 전 중화민족 공동의 정신적인 재산이고 공유되는 심미적 기쁨과 유쾌함이다.”고 지적해냈다.
 
24일에는 회의폐막식 및 제1기 “중화무협소설창작대상” 시상식을 인민대회당에서 융성하게 거행하였고 중앙TV방송국과 각 주요 신문이 모두 보도하였다.

읽었거나 읽고 있는 원문 소설 (무순)

무협 일반 2010. 1. 19. 17:29 Posted by 비천호리

제 기준으로 재미있는 책은 끝까지 읽었고, 어릴 때 읽어서 가졌던 느낌과 다르거나 스토리 전개가 너무 느린 책들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다시 읽어야지요.
1. 곤륜(昆侖) - 봉가(鳳歌) 
2. 투권(偸拳) - 백우(白羽)
3. 봉적용부(鳳笛龍符) - 운중안(雲中雁, 구양객 歐陽客)
4. 심진기(尋秦記) - 황역(黃易, 중문판 소장)
5. 관락풍운록(關洛風雲錄) - 사마령(司馬翎)
6. 검신전(劍神傳) - 사마령(司馬翎)
7. 팔표웅풍(八表雄風) - 사마령(司馬翎)
8. 백제청후(白帝靑后) - 소슬(蕭瑟)
9. 천룡권(天龍卷) - 고용(高庸)
10. 벽안금조(碧眼金雕) - 소슬(蕭瑟), (중단)
11. 대당쌍룡전(大唐雙龍傳) - 황역(黃易), (중단)
12. 다정검객무정검(多情劍客無情) - 고룡(古龍), (중단)
13. 비호외전(飛狐外傳)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14. 설산비호(雪山飛狐)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15. 연성결(連城訣) - 김용(金庸, , 중문판 소장)
16. 천룡팔부(天龍八部)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17. 사조영웅전(射雕英雄傳)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18. 백마소서풍(白馬嘯西風)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19. 녹정기(鹿鼎記)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0. 소오강호(笑傲江湖)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1. 서검은구록(書劍恩仇錄)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2. 신조협려(神雕俠侶)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3. 협객행(俠客行)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4.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5. 벽혈검(碧血劍)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6. 원앙도(鴛鴦刀)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7. 월녀검(越女劍) - 김용(金庸, 중문판 소장)
28. 금검조령(金劍雕翎) - 와룡생(臥龍生)
29. 강호야우십년등(江湖夜雨十年燈) - 사마자연(司馬紫煙), (중단)
30. 탈혼기(奪魂旗) - 제갈청운(諸葛靑雲), (중단)
31. 흑유전(黑儒傳) - 진청운(陳靑雲)
32. 취서생(醉書生) - 진청운(陳靑雲)
33. 창해(滄海) - 봉가(鳳歌)
34. 현천보록(玄天寶籙) - 난립(蘭立)
34. 하악점장록(河岳點將錄) - 이용(易容)
 

중화민국 25년(1937년) 봄, 고도(故都) 유리창(琉璃廠)의 노점에서 시를 써놓은 작은 책 한 권을 발견하였는데, 종이가 반쯤 파손된 상태로 “화계어은(花溪漁隱)”이라는 서명이 돼 있었다. 대략 건륭(乾隆)-가경(嘉慶) 때(1736~1820)의 사람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원숙하고 힘있는 필치의 행해체(行楷體)로 깨알같은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시 한 연(聯)이 있었다.

“처자식이 좋다 해도 지기(知己)는 아니니, 장부로서 처자식을 얻고 잃는 문제는 본래 중요하지 않다(妻孥雖好非知己,得失原難論丈夫)”

자못 의미심장하여 책자를 사서 돌아와 세밀히 읽어보았다. 책자에는 시 100여 수와 명말(明末)의 일화(逸話) 10여 편이 적혀 있었는데 많은 글 중 칠살비(七殺碑)라는 제목이 붙은 문장 한편이 들어있었다. 그 내용을 요약한다.

「장헌충(張獻忠)이 촉(蜀) 땅을 차지한 후 제왕을 참칭, 연호를 대순(大順)으로 하고 사람이 많이 다니는 사통팔달의 길에 성유비(聖諭碑)를 세웠는데 비석에 적히기를 ‘하늘은 사람에게 만물을 주었으나, 사람은 아무것도 하늘에 보답하지 않는다. 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죽여라(天以萬物與人,人無一物與天,殺、殺、殺、殺、殺、殺、殺)‘하는 글이니 즉 세상에 전하는 칠살비이다.

비문에 살(殺)자가 여섯도 아니고 여덟도 아닌 꼭 일곱 글자인 것은 무엇 때문인가? 촉 땅의 전고(典故)를 잘 아는 노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장헌충이 촉 땅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도살하였으나, 누차 천남칠호걸(川南七豪傑)에게 패배하였다. 그가 이를 매우 한스럽게 생각하여 비석을 세워 맹세를 기록하니 이것이 칠살비(七殺碑)이다.

죽일 것을 맹세한 칠웅(七雄)이 누구인가? 화양백(華陽伯) 양전(楊展), 설의랑(雪衣娘) 진요상(陳瑤霜), 여비위(女飛衛) 우금문(虞錦雯), 승협(僧俠) 칠보화상(七寶和尙) 희용(晞容), 개협(丐俠) 철각판(鐵脚板) 진등효(陳登皞), 고협(賈俠) 여비(餘飛), 새백온(賽伯溫 ) 유도정(劉道貞) 등이 바로 그들이다.


글은 칠웅의 사적(事迹)을 나누어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이 기이하고 볼만했다. 양전은 칠웅의 우두머리였는데, 책자에서는 그 생애와 의병을 이끌고 천남(川南)을 회복한 일들을 특히 자세히 서술하고 있었다. 양전은 금은(金銀)의 냄새를 식별할 줄 알았고 기문오행술에 뛰어났다고 적어 거의 소설가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적힌 내용은 모두 근거가 있었으니 오매촌(吳梅村)의 녹초기문(鹿樵紀聞), 팽준사(彭遵泗)의 촉벽(蜀碧) 등의 책에 실린 양전전(楊展傳)에도 기문오행술에 정통하다고 적혀 있어 학문이 넓은 선비도 그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어찌 정말로 이런 신기한 술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도박물관(成都博物館)에 가서 칠살비를 보고 온 벗이 말하기를 그 글이 약간 달라지고 일곱 글자 가량이 없어졌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원래의 비석은 청(淸) 조정에 의해 부서졌다고 말했다. 어떤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으나 지금 촉땅의 사람들은 양전의 유적을 만인분(萬人墳)이라 부르고 있다. 칠웅의 충의와 절개에 대해 글로 제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이를 정리한다.

“화계어은”은 각종 사서에 실린 내용을 정리하고 전해오는 이야기를 노인들로부터 수집하여 칠웅의 사적을 종합하였고, 옛 소설로 풀어냈지만 황당무계하고 비정상적인 내용은 빼버렸다. 화계어은이 쓴 글에 따르면 책 제목을 칠살비라고 붙인 것은 칠웅의 사적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칠웅은 명말(明末)에 함께 힘을 합쳐 천남을 무대로 종횡무진 활동하여 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지켜냈으나 결국은 융통성 없는 대관(大官)에게 붙잡혀 스스로 힘을 없애고 나라를 위해 요절하였다. 이로써 촉 땅 전체가 극도로 혼란해졌으니 그 사적이 장렬하여 슬프기도 하고 가히 풍속으로 삼을만하다.


작자는 이미 굳어버린 재주를 억지로 되살려 문자유희로 그럭저럭 남은 세월을 보낼 뿐이다.

중화민국 38년 봄 析津에서 주정목 적음.

주정목 작품목록
《울금향 鬱金香》《철한 鐵漢》《염마도 艶魔島》《칠살비 七殺碑》《호소용음 虎嘯龍吟》《비천신룡 飛天神龍》《용강표은기 龍岡豹隱記》《용강여협 龍岡女俠》《나찰부인 羅刹夫人》《옥룡관 玉龍岡》《묘강풍운 苗疆風雲》《변새풍운 邊塞風雲》《오사일봉 五獅一鳳》《서인검 庶人劍》《탑아강 塔兒岡》《틈왕외전 闖王外傳》《익왕전 翼王傳》
 
장헌충(張獻忠, 1606~1646)
중국 명(明)나라 말기 반란군 수령. 섬서성(陜西省) 연안(延安) 출생

한때 연수진(延綏鎭)의 수비병이 되었으나 1630년 미지현(米脂縣)의 농민들을 이끌고 봉기하여 팔대왕(八大王)이라 칭했으며 각처의 농민군과 부즉불리(不卽不離)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섬서에서 하남(河南)-호북(湖北)-안휘(安徽)를 전전하면서 싸웠다. 사천(四川)에 들어갔으나 불리했기 때문에 반전하여 43년 무창(武昌)을 공략하고 대서왕(大西王)이라 칭했다.

이듬해에 다시 사천으로 나아가 중경(重慶)-성도(成都)를 함락시킨 뒤 대서국(大西國)을 세우고 황제에 올라 연호를 대순(大順)이라고 하고 성도를 서경(西京)이라 불렀다. 그는 이 무렵에 화북(華北)에서 활동한 이자성(李自成)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령이 되었다.

건국 후에는 호남(湖南)과 강서(江西)도 공략했고, 군율을 엄격하게 다스려 살상과 폭행을 금지시켰다. 또 3년간 조세를 면제시키고 농노를 해방했으며 파자군(婆子軍)이라는 여성부대를 편성,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등 새로운 정책으로 농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중소지주와 사대부 등의 지지를 잃고 이자성과 연합하지도 못한 채 청나라 군사의 남하에 호응하는 사천 지주들의 탄압을 받고 3년 동안 저항하다가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