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은 사람들에게 읽혀지기 위해 쓰여진다.
소설에는 사람에 관한 내용이 담겨있다.
소설은 한 사람, 몇 사람, 한 무리의 사람들 혹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성격과 감정을 묘사한다.
그들의 성격과 감정은 횡으로는 그들이 처한 환경에서, 종으로는 그들이 겪어온 일들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며 사람과 사람간의 교류와 관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장편소설 가운데 '로빈슨 표류기'만이 단지 한 사람에 대해 그리고 그와 자연간의 관계에 대해 묘사한 것 같지만 뒷부분으로 가면 결국은 하인인 '프라이데이'를 등장시키고 있다.
한 사람에 대해서만 쓴 단편소설은 많은데 그 사람이 환경에 접하는 과정에서 그의 외부에 표현되는 세계와 내심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고 특히 내심의 세계를 많이 그리고 있다.
서양의 전통적인 소설이론은 환경, 인물, 줄거리의 세 요소로 구별하여 작품을 분석한다. 소설 작가들은 각기 개성과 재능이 같지 않기 때문에 중점을 두는 부분도 다르다.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쓴다는 점에서 무협소설은 다른 소설과 똑 같다.
다만 시대배경이 고대이고 무공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며 격렬한 싸움에 줄거리가 치우쳐 있을 뿐이다. 어떤 소설이든 특별히 중점을 두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애정소설은 남녀간의 기질과 관련된 감정을 묘사하고 사실소설(寫實小說)은 특정한 시대의 환경을 그려낸다.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 같은 소설은 큰 무리의 사람들의 투쟁과정을 서술하고 현대소설은 곧잘 등장인물의 심리과정을 중점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설은 예술의 일종이며 예술이 기본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사람의 감정이고, 주요 형식은 넓은 의미에서의 미(美), 미학적인 의미에서의 미(美)이다.
소설에서는 그것이 문장이 아름답거나 구성이 멋지거나 간에 관건은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를 어떤 형식을 통해 어떻게 표현해 내느냐 하는데 있다.
어떤 방법이든 좋다. 작자가 주관적으로 분석하든 혹은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든 간에 인물의 행동과 말에서 객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내용과 독자 자신의 심리상태를 결합시키기 시작한다.
같은 소설을 읽더라도 어떤 사람은 강한 감동을 받는 반면 어떤 사람은 지루해하고 싫증을 내기도 한다.
독자의 개성과 감정이 소설 속에 묘사된 개성과 감정에 접촉하면서 '화학반응'이 생기기 때문이다.
무협소설은 인정(人情)을 표현하는 특정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작곡가가 자신의 어떤 정서(情緖)를 표현하기 위해 피아노라든가 바이올린, 교향악 혹은 노래의 형식 등을 사용할 수 있고, 화가가 유화, 수채화, 수묵화 또는 만화 중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형식을 선택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떤 형식을 취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표현솜씨의 좋음과 나쁨 그리고 독자와 청자(聽者), 관람자의 마음과 통하여 공명(共鳴)을 일으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다.
소설은 예술형식중 한 가지이다.
좋은 예술이 있는가 하면 좋지 않은 예술도 있다.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예술에서는 미의 범주에 속하고 진실이나 선(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미를 판단하는 기준은 아름다움과 느낌이지 과학상의 진실이나 거짓이 아니며 도덕상의 선악(善惡)도 아닐 뿐 아니라 경제적인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정치적으로 통치자에게 유리하냐 불리하냐도 아니다.
당연히 어떤 예술작품이라도 사회에 영향을 끼치며 그것으로 가치를 판단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일종의 다른 평가방법일 뿐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의 힘이 모든 것에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이 유럽의 박물관에 가서 관람해보면 중세기의 회화(繪畵) 모두가 성경을 소재로 하고 있고, 여체의 미를 표현할 때도 반드시 성모의 이미지에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야 비로소 일반인의 형상이 회화와 문학에서 표현되기 시작하는데 르네상스라고 하는 것은 문예상으로 그리스, 로마시대의 '사람'에 대한 묘사를 부활시킨 것으로 더 이상 집중적으로 신과 성인에 대해 묘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중국인의 문예관은 오랫동안 '문이재도'(文以載道: 문장으로 성현의 도를 밝히는 것)였으므로 중세 유럽 암흑시대 당시의 문예사상과 똑같이 '선(善) 또는 불선(不善)'을 문예의 가치판단 기준으로 삼아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 있는 연가(戀歌)를 임금을 풍자하거나 비빈(妃嬪)을 찬미하는 것이라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하였다.
도연명의 '한정부(閒情賦)', 사마광, 구양수, 안수 등의 그리움이 가득한 애련(愛戀)의 시들을 혹자는 옥의 티라고도 하고 혹자는 달리 가리키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호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들은 문예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 감정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고 문자의 유일한 기능은 단지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가치를 위해 이용되는 것이라고 여겼다.
나는 무협소설에서 단지 약간의 인물들을 형상화하고 그들이 특정한 무협환경(고대사회이고 法治가 아니라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사회) 가운데서 겪게되는 일들을 묘사했을 뿐이다.
그 당시의 사회와 현대사회는 많이 다르지만 사람의 성격과 감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다.
고대인의 슬픔과 기쁨, 이별과 만남, 희노애락(喜怒哀樂)은 여전히 현대 독자들의 심령(心靈)에 상응하는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물론 독자들은 표현수법이 졸렬하고 기교가 미숙하며 묘사가 깊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미학의 관점에서 보면 저급한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든 간에 나는 무슨 도(道)에 관한 내용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무협소설을 쓰면서 동시에 정치평론도 쓰고 철학, 종교와 관련된 글도 써왔다.
사상에 관련된 글은 독자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것으로 이런 글에 대해서는 옳고 그름이나 진실, 거짓의 판단이 있을 수 있으며 독자들은 완전히 동의할 수도 있고 일부분에 대해서만 동의할 수도 있고 혹은 완전히 반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에 대해서는 나는 독자들이 단지 '좋아한다 ' 또는 '좋아하지 않는다'라든지 '감동을 받았다' 또는 '지루하다'라고만 말하기를 바란다.
내가 가장 기분이 좋은 것은 독자들이 내 소설에 나오는 어떤 인물들을 좋아한다거나 증오한다는 것이며 그러한 감정이 있다는 것은 내 소설 속의 인물이 이미 독자의 심령과 서로 연계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설을 쓰는 사람의 가장 큰 바램은 약간의 인물들을 창조하여 그들이 독자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변하도록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예술은 창조이다. 음악은 아름다운 소리를, 회화는 아름다운 시각적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이고 소설은 인물을 창조하려고 하는 것이다.만일 현실 그대로만을 표현한다고 하면 녹음기나 사진기가 있는데 구태여 음악이 필요하고 회화가 더 필요하겠는가?
신문, 역사서적, 다큐멘터리 방송, 사회조사통계, 의사의 병력(病歷)기록, 당과 경찰국의 인사문서가 있는데 거기에 더하여 굳이 소설이 있을 필요가 있을까?
1986. 2. 6 홍콩에서
김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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