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석지중은 돌 벽에 있는 기관(機關)을 알아차렸으므로 안심하고 지하통로로 뛰어들었다. 이때 그는 벽에 있는 기관의 손잡이를 한심수사가 설치한 것을 알아보자 어쩌면 부친에게미리 어떤 생각이 있었고, 다른 비밀통로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들자 조금 전보다 더 기분이 좋아졌다.지하통로에 들어서자 몇 척(尺) 앞쪽에 벽에 걸린 큰 등불이 사방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데 연기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일장(一丈) 정도의 거리에 안쪽으로 난 세 갈래 길이 분명하게 있긴 한데 끝이 보이지 않고 안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두 손으로 벽을 두드려 보고는 등불 밑으로 가서 그 등불을 힘주어 뽑아 냈다.
"끽끽" 한바탕 가벼운 소리가 나며 앞쪽 세 갈래 길이 갈리는 곳에서 강판(鋼板)이 솟아올라 아래쪽 통로로 통하는 돌계단을 드러냈다.석지중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돌계단을 따라 끝까지 내려가자 부들방석과 화로 한 개씩만 놓인 어두침침한 석실(石屋) 한 칸이 보였다.화로에서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고요하여 그의 발걸음 소리가 뚜렷하게 실내에 울리고 땅속 방이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너무나 고요하여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소름이 끼쳤다.석실 안으로 들어섰지만 사람이 보이지 않자안쪽으로 걸어들어 가자 얼핏 방안에 늘어선 열 몇구의 관(棺)과 향안(香案)이 바쳐진 많은 위패가 보였고 위패 앞에 긴 두루마기 차림에 은발(銀發)을 묶은 노인이 땅에 꿇어앉아 있는 것이 보였으므로 저도 모르게 놀라서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노인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을 떨고 있었지만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계속 꿇어앉아 있었다.
석지중이 미간을 찌푸리며 움직이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꿇어앉아 있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 그 노인이 말했다.
"너는 누구냐?"
"노선배(老先輩)님이 천산노인(天山老人)이시죠? 저는 석지중입니다."
그 노인이 약간 놀라며 말했다.
"너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느냐?..."
그리고 잠깐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온몸을 한차례 떨며 감정이 격해져서 말했다.
"네가 한심수사의 아들이지?"
석지중이 몸을 굽혀 인사하며 말했다.
"소질(小侄)이 바로 한심수사의 아들입니다. 사백(師伯)님께서는 어쩌다가..."
천산노인이 말했다.
"네 아버지는?"
석지중이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아버님이 안 오셨다구요! 아버님은 동해 멸신도의 대력귀왕과 쇄금신장에게 포위되자 저에게 집으로 들어가라고....
그리하여 방금 일어났던 일을 천산노인에게 모두 알렸다.
천산노인이 탄식을 하더니 말했다.
"이로써 천산파는 무림에서 이름이 사라지겠구나. 다 내 탓이다..."
그리고는 손으로 머리를 치며 더할 나위 없이 낙담하여 말했다.
"내 탐욕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천산파가 내 대에서 무너지는구나..."
그가 비통하게 고함을 지르더니 탁자 위의 향안을 향해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소리쳤다.
"역대조사(歷代祖師)님들이시여! 용서해 주십시오. 제자가 심력(心力)을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천산파의 부흥을 도모했지만 밖으로 강적을 만나고 안에서는 요사한 반도가 나와 본파가 다시 망하는 화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석지중은 이때서야 향안에 모셔진 것이 역대조사의 위패라는 것을 알고는 따라서 무릎을 꿇고 위패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가 막 머리를 들자 천산노인이 곡(哭)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떨리게 하는 곡성이 온 석실에 가득 차 석지중의 마음에 매우 깊게 부딪혔다.
천산노인은 석지중도 울기 시작한 것을 듣자 탄식을 토하며 말했다.
"아이야 너는 왜 우느냐? 응!"
석지중이 말했다.
"아버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천산노인이 한참동안 침묵하다가 불렀다.
"아이야! 이리 오너라."
석지중이 대답하며 가까이 가자 천산노인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는데 얼굴에 칼자국 있고 검붉은 피부에 우둘투둘한 흉터가 있는데다가 온 얼굴이 뒤틀려있어 사람이 아니고 마치귀신처럼 보였다.
천산노인이 석지중의 눈에서 놀라는 빛을 보고 바삐 말했다.
"아이야 놀라지 마라"
그가 바닥에 있는 부들방석을 두드리며 말했다.
"앉거라, 너한테 할말이 있다."
석지중은 천산노인에게서 한심수사가 늘 자기를 바라볼 때처럼 한 줄기 자상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나타나는 것을 보자 즉시 마음속의 불안감을 떨쳐버리고 앉았다.
천산노인이 찬탄하며 말했다.
"근골이 좋구나, 정말 인재(人才)구나!. 아이야 네 아버지가 천산의 검법과 내공을 너에게 전수해 주었느냐?
석지중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가부(家父)께서는 저에게 정좌연공(靜坐練功)만 가르쳐 주셨고 검법은 제 나이가 아직 어리다고 전수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천산노인의 눈빛이 석지중의 얼굴을 응시하더니 탄식을 토하며 말했다.
"네 아버지의 말이 맞지는 않다만 나는 그의 뜻을 분명히 알겠다. 아! 네 사조(師祖) 대(代)에 본문의 절예를 잃어버린 후 무림에서 본문의 지위가 천장(千丈)이나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니... 네 사조께서는 왕년에 황산(黃山)에서 검 한자루로 군웅(群雄)을 대적해 금과(金戈)와 옥극(玉戟)을 차지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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