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사군이 꿇어앉은 채 말했다.
“전배께서 제 목숨을 구해주셨습니다. 전배를 위해 견마(犬馬)의 노고를 다하겠습니다.”
중년 문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부모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느냐?”
언사군이 눈믈을 떨어뜨렸다.
“”제자는 감히 부모님의 원수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중년 문사가 또 말했다.
”그렇지만 내가 너의 원수를 갚기에 충분한 무공을 전수해 줄수 없다고 해도 나를 따라가겠느냐?“
언사군이 생각했다.
”내 이 목숨은 어차피 뜻밖에 얻어진 것이고, 이 사람은 자기에게 큰 은혜가 있는데 어찌 갚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가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제자는 원합니다.“
중년 문사가 미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후회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다!”
말하며 한 손으로 유건(儒巾)을 벗자 여자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놀랍게도 그 중년문사는 여자였던 것이다.
언사군이 마음속으로 가볍게 실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했다.
“제자,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중년 문사는 비록 여자였지만 그의 목숨을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그를 잘 대해주었다.
일시적으로 원수를 갚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로서도 원망할 것이 없었다.
중년 문사가 살짝 탄식하며 말했다.
“그럼 좋다. 너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것이 좋겠구나. 나는 을목도(乙木島)의 도주(島主) 을목신군(乙木神君)이다”
언사군은 깜짝 놀랐다.
동해 을목도 도주 을목신군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년(當年) 어쩌다 중원에 들어왔다가 검(劍)으로 노산오추(勞山五醜)를 베고 장(掌)으로 오행팔괴(五行八怪)를 죽여 위명이 무림을 떨어 울렸었다.
그러나 신비로운 용(神龍)이 잠깐 얼굴을 내밀듯이 다시는 중원 땅을 밟지 않았었는데 자기가 오늘 우연히 만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림에서 을목도의 도주가 단지 한 여자일 뿐이라는 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을목도주가 가벼이 탄식하며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유건을 썼다.
언사군은 눈앞의 사람이 을목도주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가 이번에는 기뻐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을목신군이 언사군에게
“군아(軍兒!, 우리 돌아가자!”
라고 말하면서 언사군을 옆구리에 끼고 봉우리 아래로 달려갔다.
고찰(古刹)은 다시 쓸쓸한 기운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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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기다리지 않고 지나 유수(流水)처럼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열여덟 아홉쯤 돼 보이는 청의(靑衣)의 소년이 바닷가에 서 있는데 마침 범선(帆船) 한 척이 차츰 해안에서 멀어져 바다로 나아가 그의 눈에서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
범선이 점점 바다에서 사라지자 그가 고개를 돌려 육지쪽을 바라보면서 혼잣말을 했다.
“10년이 지나갔다!, 끝내는 돌아왔구나!”
그는 입가에 가벼운 웃음기를 띠며 허리춤에 걸린 장검(長劍)을 한번 만져보고는 손에 든 보따리를 치켜들고 육지로 걸어갔다.
그는 바로 10년 전 해외(海外)의 기인(奇人) 을목도주가 데리고 갔었던 언사군이었다.
언사군은 황무지를 지나 성 안으로 들어갔다.
10년 동안 을목도주가 진심으로 돌봐준 덕분에 그는 다시 중원에 돌아왔다.
칠대문파에서 일곱 개의 고정(古鼎)을 빼앗고 더하여 그 일장(一掌)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었다.
그는 성 안을 한동안 돌아본 후 고개를 한번 들어보니 요리점 앞인데 건물에는 크게 취영루(翠英樓) 세 글자가 씌어 있었다.
언사군의 마음이 살짝 움직였다. 자기도 배가 약간 고픈데 요리점에 올라 식사를 좀 하고 나서 다시 길을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가 요리점에 오르자마자 그 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이 모두 놀라면서도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마도 자기가 낯설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생각하며 개의(介意)치 않고 창쪽 자리를 찾아 앉았다.
언사군이 막 자리에 앉았는데 황의(黃衣) 대한(大漢)이 언사군에게 다가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친구, 여기 막 도착한 것 같은데 여기 규칙을 모르는 거요? 아니면 시비를 거는 거요?”
언사군이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들어 그 사람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무슨 규칙인지 귀하가 알려주시겠소?”
그 사람이 “흥”하며 말했다.
“누하령(樓霞嶺) 주위 3백리 안에서는 무림 친구들은 병기를 갖고 다닐 수 없소”
언사군이 담담히 웃으며 생각했다.
“요 몇 해 사이에 누하령에 도대체 무슨 괴물(牛神鬼怪)이 출현했기에 이렇게 위세가 대단할까? 3백리 안에서 병기를 휴대할 수 없다니”
다만, 그 말을 한 자의무공이 너무 낮아 달리 생각할 필요도 없었고, 싸움을 해봐야 체면만 상할 것 같아서 그는 느릿하게 장검을 풀었다.
그 사람은 언사군이 푸는 장검을 보니 한눈에도 칼집 모양이 매우 예스러워 범상한 물건이 아닌 듯 하고, 또 보아하니 언사군이 무공을 할 줄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음속으로는 십중팔구 무슨 문사(文士)나 수재(秀才)가 모양새로 장검을 걸쳤겠지라고 짐작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언사군에게
“검을 내게 주시오!”
라며 손을 내밀어 붙잡으려고 했다.
언사군은 자기가 풀어낸 장검을 이 사람이 빼앗으려는 것을 보았다.
이 검은 그의 사부 을목도주의 물건인데 어찌 이런 도둑놈에게 빼앗기려고 하겠는가?
그가 안색을 굳히며 왼손으로 그 사람의 손목 맥문(脈門)을 잡은 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짓이냐?”
그 사람은 손이 막 장검에 닿으려는 순간에 갑자기 손목 맥문이 제압당하자 깜짝 놀라 그제서야 고인(高人)을 만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사군이 천천히 왼손을 펴며 말했다.
“누하령에 사는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까지 날뛰는데 내 어찌 그냥 놔두겠느냐?”
그 사람은 본래 겁을 먹고 있었는데 이때 언사군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는 큰 소리로 욕을 했다.
“네 이놈, 감히 천산대협(天山大俠) 백봉우(白鳳羽) 백대야(白大爺)를 욕하는 걸 보니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구나!”
언사군은 그가 끄집어낸 사람이 바로 천산칠검의 사제 백봉우인 것을 듣자 생각했다.
“천산칠검도 중원 칠대문파에게 해침을 당했다고 할 수 있으니 나와 똑같은 원한이 있다.
이런 조그마한 일로 불쾌하게 굴 필요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