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묘(古墓)
제1회, 곽양의 전국여행, 구판에는 그녀가 종남산 고묘에 간 것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신수판에서 그녀는 간 적이 있고, 고묘에서 두 시녀가 나와서 양과 부부가 외출하여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고 언제 돌아올지도 말하지 않았다. 곽양이 고묘에서 3일을 기다리지만 그들이 여전히 돌아오지 않아 다시 유람의 길을 시작한다. 양과와 소용녀가 화산에서 헤어진 후 어디로 갔는지는 줄곧 수수께끼인데 현재 김용이 수수께끼를 풀었지만 하나도 재미 없다. 곽양이 양과가 어쨌든 고묘로 돌아올 거라는 것을 알고도 여전히 도처로 그를 찾아다닌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다.
2. 대금국의 유해(遺骸)
제1회, 곽양과 소림승 사이에 다툼이 생겼을 때 소림승이 관료적인 말투로 대하자 구판에서는 곽양이 냉소하면서 묻는다. 당신들은 대송 황제의 벼슬아친가요? 아니면 몽고 황제의 벼슬아친가요? 신수판에서 그녀는 소림승에게 옵션을 하나 추가한다. “그것도 아니면 여전히 대금황제의 벼슬아친가요?.” 이것은 아마도 대금국의 마지막 출현일 것이다. 몇 달 전에 내가 완안아골타와 소봉이 장백산 아래서 함께 술 마시고 사냥하는 것을 목격한 것을 회상하면 불과 몇 달만에 소봉의 고국과 완안아골타의 고국이 모두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게 될 줄을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참으로 슬프고 처량하기도 하고 감개무량하다.
3. 천년소림
제1회의 소림승부터 시작하여 소설 등장인물은 늘 “천년 이래”,“천백년”,“천여년”등의 말을 한다. 생각건대 이 때는 서기 1262년 전후이고 소림사가 처음 건립된 건 495년이다. 일반인은 소설을 볼 때 현재의 환경을 대입하기 쉽고 소림사는 현재로부터 확실히 1천 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곽양의 그때는 7백여 년에 불과하여 “천년”으로 불릴 자격이 아직 안되었다. 의천도룡기가 끝나는 시점에도 8백 5십년을 막 넘어섰을 뿐이라서 억지로 “천년”이라 하여도 양보하는 것이다. 천룡팔부 가운데의 소림승이 유사한 표현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는 시간이 더 짧았다. 이 사람들은 모두 시간 이동을 하여 돌아간 것인데 김용이 수정하는 걸 잊어버렸다.
덧붙임 : 뒤쪽에서는 공문(空闻)만이 한 번 “8백년”이라고 한 것 같다.
4. 손가락을 자르다.
제1회, 한 소림승이 손을 써 곽양의 단검을 억지로 남기려고 하자 구판에서는 곽양이 그의 왼쪽 두 손가락을 잘라버리는데 신수판은 베어서 상처를 내는 것으로 고쳤다. 자르는 것은 확실히 어느 정도.... 잘 처리된 것은 아닌 것 같다.
5. 낙영장
신수판 사조영웅전은 구판의 “낙영장법(落英掌法)을 도화낙영장(桃华落英掌)으로 바꾸었고 여기서 곽양이 사용할 때에도 그에 맞추어 수정하였다.
6. 니추공(泥鳅功)
제1회, 한바탕 비무(比武)를 통해 문파를 판단하는 시험에서 곽양은 10초로 한정하여 무색(無色)을 시험한다. 곽양이 사용한 여섯 번째 초식이 영고의 니추공이다. 구판은 그녀가 양과와 흑룡담에 가서 구미영호를 잡았을 때 영고가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지만, 신수판에서는 그녀가 영고에게 니추공이라는 무공이 있다는 것을 듣고 가르침을 청한 것으로 설명한다. 내 인상에 의하면 신조협려의 양과는 흑룡담에서 분명히 영고와 싸운 적이 없어서 영고가 니추공을 시전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7. 능가경
제1회, 장군보가 곽양에게 각원이 벌을 받는 원인을 말하는데 바로 신조협려 제40회에서 발생한 능가경 도난사건이다. 신수판 신조협려가 능가경의 내력(來歷)을 수정하였기 때문에 여기서도 상응하는 수정을 하였다. 신수판 신조협려 참고
8. 전서(戰書)
제1회, 곤륜삼성이 소림파에 도전장을 보내는데 구판 중의 전서에는 시간이 없는데도 무색선사는 “신통광대”해서 “열흘 후”라는 것을 안다. 신수판에서는 이 착오를 수정하여 “열흘 후(十天之後)” 네 글자를 전서에 추가하였다.
註) 신수판 이전에 몇몇 판본은 이미 이 시간을 추가하였었다.
9. 광고
신수판 제1회 뒤에 주를 달아, 현재 소림사는 이미 여자가 절에 들어오는 것을 불허하는 규정을 폐지하였다고 말하고, 남녀를 막론하고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한다.
10. 추리
제2회, 서역소림의 3인이 산중턱에서 하족도에게 가볍게 격패 당하는데 구판에서는 자세히 쓰지 않았다. 신수판은 3인이 실의하여 소림사로 돌아가는 길에서 이 사람이 곤륜삼성 하족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고 한다. 이렇게 바꾸니 스토리가 더 합리적으로 되었다.
11. 심선당 칠로
제2회, 소림파 방장 천명(天鳴)이 자기의 무공이 서역소림의 세 사람보다 그다지 높지 않다고 생각하여 하족도와 맞서면 분명히 패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심선당 칠로가 나와 국세를 안정시키도록 한다. 구판은 그들의 무공이 헤아릴 수 없이 깊다고만 표현하였으나 신수판에서는 설명을 추가하여 심선당칠로의 배분이 천명보다 높다고 한다.
12. 정확한 나한권
제2회, 장군보는 열흘동안 철나한에서 새로 배운 나한권으로 하족도와 싸운다. 신수판에서는 한 부분을 추가하여 만약 사람이 무공을 가르쳤다면 매번 초식을 사용할 때마다 오차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장군보는 철나한을 따라 배웠고 철나한은 매우 정확하여 장군보의 권법이 매우 정확하였다고 말한다.
13. 죄를 뒤집어씌우려 하다.
제2회, 장군보는 스스로 배운 나한권으로 하족도를 물리치자 심선당칠로 그 유명한 늙은기가 튀어나와 마치 장군보를 마치 산채로 찢어죽일 듯이 그를 처벌하려고 한다. 신수판에서는 한 부분을 추가하여 나한당 수좌 무색이 철나한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지만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도리어 자기조차도 처벌을 받아야만 한다.
14. 구양진경의 저자
제2회, 각원이 곽양과 장군보를 데리고 소림사를 도망쳐 나와 한밤중에 경문을 읽는데, 소리 내어 외우는 것은 구양진경이다(기괴한 것은 이 노화상은 읽지 않은 책이 없는데 굳이 죽기 전에 암송하는 것이 무학비적이라니, 하하). 신수판 신조협려에서 이 구양진경의 내력을 언급했지만 이곳에서 다시 거론하고 게다가 더 상세하다. 구양진경을 쓴 고승은 출가 전에 도사였고, 그 때문에 구양진경은 완전히 불교무공일 수 없어서 순전히 도교의 무공인 구음진경과 같지 않다. 이 고승은 구양진경을 깨우친 후 감히 동료들과 토론하지 못하고 손 가는대로 능가경 행간의 빈곳에 적어 놓았다. 그러나 소림승들은 모두 漢語版 번역본 능가경을 읽었으므로 산스크리트어로 된 이 오래된 경서는 각원이 출현하기 전에는 아무도 들춰보지 않았다. (이건 번역판 해리포터가 있다고 쳐도 영어판을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일까....)
15. 장삼봉
제2회, 곽양은 장군보와 헤어지면서 그가 양양의 자기 부모에게 몸을 의탁하라고 당부한다. 장군보는 호북 무당산에 이르렀을 때 무심코 촌민(村民)의 교화를 받아 그로부터 무당산에 머물면서 구양진경을 부지런히 익힌다. 구판에서는 그가 수년 후에 구양진경을 깨우쳤다고 하고 달마조사가 쓴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으며 그 후 또 많은 도가의 경전을 읽어서 결국 무당파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신수판에서는 앞부분을 따라 그가 구양진경을 깨우쳤고 달마가 지은 것이 아니라는 부분을 삭제하였다. 도가경전을 많이 읽었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이유극강(以柔克剛), 물극필반(物極必反) 같은 노자(老子)의 올바른 도리를 자세히 썼고, 진무관(眞武觀)에서 출가(이렇게 말하니 진무관이 무당파보다 오래되었구나)하여 마침내 무당파를 창건한다. 장군보가 무당파를 창건하도록 촉진한 인물에는 그 고집불통 심선당칠로, 오만한 기세로 남을 깔보는 곽부가 있었으니 참으로 감개를 느끼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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